농구 KBL 선수 소개 : '마산 소년, 두터운 알을 깨고 창원의 기둥을 향해 나아가다' LG 박정현
- 최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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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사라진 시대다.
스포츠판이라고 세상과 다른 시대를 사는 건 아니어서 프랜차이즈 스타와 원클럽맨이 서로 옷을 바꿔입는 예전 같았다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 일어난다. 그와 함께 은퇴하는 날까지 팀의 경기장을 지켜줄 거라 믿었던 선수가 알고 보니 진작부터 마음이 떠나 있었다는 뒷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팬질'이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다. 좋아하기에, 응원팀에서의 은퇴식까지 보고 싶기에 이름을 붙인 유니폼을 산 선수와 그렇게 힘겹게 정리하는 것조차 한순간의 일인 게 현대 스포츠 시장에서 팬들이 처한 현실이다.
한국남자프로농구(KBL)의 창원 LG 같은 경우는 지난 시즌이 그랬다. 데뷔는 울산 모비스에서 했지만 2년차부터 LG로 팀을 옮겨 정규리그 우승과 플레이오프 진출 등 숱한 팀의 역사를 함께해온 선수가 있었다. 그 선수는 또다른 기둥이 나쁜 뒷이야기를 남기며 팀에서 떠날 때 창원에 남았고, 계속되는 선수단의 변화 끝에 유일하게 남은 프랜차이즈 스타기도 했다. 그런 김시래가 지난 시즌 도중 서울 삼성으로 떠났다. 상대팀의 원클럽맨이었던 이관희를 창원에 남긴 채.
충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농구 기자들이 운영하는 유튜브에서 뒷이야기가 나왔고, 진작 알고 있었던 사실-김시래의 FA 때 LG 구단은 김종규를 잡고 김시래는 사인 앤 트레이드로 타팀에 넘길 생각이었지만, 김종규가 먼저 떠나는 의외의 상황이 펼쳐지자 이미 타팀에 가는 것으로 여겨졌던 김시래를 황급히 잡았다-로 인해 김시래는 이전부터 LG에 마음이 떠난 상태였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고향인 서울 팀에 와 좋다"는 선수 본인의 인터뷰까지. LG 팬들은 자신들의 마지막 프랜차이즈 스타를 그렇게 허무하게 잃었다. 이관희가 꼴찌팀에서 의지 넘치는 모습을 보여줬고 시즌 후 김시래의 자리를 메울 대형 FA 이재도를 데려왔지만, 팀의 역사를 함께하고 로열티를 갖고 있는 선수가 없다는 공허함까지 채울 수는 없었다.
기존 팀 전력과 멘탈의 핵심 이관희, 7억이라는 거금을 들여 프로스펙스 유니폼을 입힌 챔피언 가드 이재도와 몇 년 동안 대체하지 못한 김종규의 자리를 드디에 메울 주전 빅맨 김준일을 영입해 야심차게 시즌을 시작한 LG는 개막전부터 김준일의 시즌아웃 부상이라는 상상도 못 한 악재를 마주하며 동력을 잃었다. 연패는 계속됐고 '이재도와 이관희가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계속 돌았다. 한 라운드를 전부 돈 현 시점에서도 LG는 꼴찌다. 그러나 김준일이 얼굴을 찌푸리고 다리를 절뚝이며 자신의 프로 커리어 전부를 보낸 잠실실내체육관을 빠져나갈 때, 역설적으로 세이커스에는 팀과 팬의 결핍을 채울 기회가 찾아왔다. 로열티를 가진 프랜차이즈 스타의 등장, 김시래 이후 누구도 메울 수 없던 공허를 메울 선수가 주전으로 뛸 기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사진을 보고 고개를 갸웃할 독자들이 많을 줄 안다. LG팬이 글을 본다면 화를 낼 수도 있다. 김시래의 자리를 메울 프랜차이즈가 골밑슛도 못 넣는 박정현이라고? 라는 반응을 예상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이 선수에겐 흉흉하고 낭만 없는 팀에 충성심을 가질 조건이 있고, 최근의 경기력은 분명 성장이라고 봐도 될 정도의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한 경기에 미들슛을 몇 개씩 꽂아넣고 속공돌파를 시도하는 상대 에이스에게 가차없는 블록을 가한다. 그것이 최근 몇 경기에서의 박정현이다. 부족하다는 평가를 숱하게 듣고 팬들의 아쉬움과 화를 받아내는 포지션이었던 그가 왜 LG의 차기 프랜차이즈감인지,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모습을 통해 들여다보려고 한다.
상남동 라건아.
투쟁심과 자신감을 회복한 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이날뿐 아니라 최근 3경기에서 그의 평균 기록은 12득점 7.3리바운드였다. 내내 자신을 괴롭히던 두려움과 주눅을 떨친 결과, 비로소 대학 시절 코트를 호령하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박정현의 반등은 팀에게 크나큰 의미가 있다.
김준일이 이번 시즌 창원 땅도 한 번 밟아보지 못하고 뛸 수 없게 된 상황에서 국내 빅맨의 약진은 단순히 준주전 한 명이 경기를 잘한 것 이상의 효과를 가져다준다. 공격리바운드 귀신인 마레이와 함께 최소한 골밑만큼은 강팀과 붙어도 경쟁력이 있는 모습을 유지한다면 LG의 시즌은 결코 2년 연속 최하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경기력보다 더 큰 의미가 코트 밖에 있다. 글 앞부분에 이야기했던 프랜차이즈 스타의 부재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는 것이다. 김영환과 김종규 그리고 김시래. LG는 새 역사를 쓰고 전성기를 달린 2010년대의 기억을 전부 없앴다. 현재 LG에서 스타성을 갖췄다 말할 수 있는 선수는 구단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에서 트레이드로 온 선수인데도 팀을 지키려고 100% 이상을 뛴 이관희와 FA로 큰 기대를 받고 우승팀에서 합류한 이재도뿐이다. 그들에 필적할 수 있던 김준일은 일단 다음 시즌을 기약해야 한다. 셋은 모두 2021년에 입단한, 엄밀히 따지면 팀의 상징과는 거리가 있는 선수들이다. 그렇다고 유망주들이 잘 크는 모습을 보여준 것도 아니니 창원의 팬들은 특정 선수에게 구단을 대표한다는 이미지를 갖기도 크나큰 신뢰와 애정을 주기도 힘든 환경에 놓였었다.
그러나 박정현은 마산에서 태어나 한 농구로 창원 프로팀에 입성한 선수고, '1순위' 만큼이나(혹은 그보다 더) '자란 곳의 프로팀'에 입단한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선수다. 실력과 주전 자리만 받쳐준다면 연고지 팬들이 얼마든 전폭적 지지를 줄 수 있는 선수라는 것이다. 그가 주전 빅맨으로 자리잡고 6강 플레이오프를 한 번이라도 통과할 수 있다면 창원 팬들이 줄 수 있는 사랑은 다른 선수보다 커질 수밖에 없다. 김시래가 이적하고 10개월, 창원 농구는 그를 대신할 새로운 대들보를 로컬보이라는 단단한 재질로 세우려 한다.
반전은 한순간에 찾아오는 듯하지만 99도까지 끓지 않던 물이 마지막 1도의 뜨거운 숨을 불어넣을 때 비로소 끓어오르듯 '한순간'을 위해 들여야 하는 노력과 시간 그리고 마음고생은 무진장 크고 괴롭다. 박정현은 1순위 치곤 마음고생이 심한 선수였다. 그렇기에 시간을 들이고 노력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찾아오는 자신감하락과 부족 체감에도 그가 내려놓은 적은 없다. 그 모든 부담을 지고 비판을 새기면서 훈련해왔고, 자신이 커간 창원의 새로운 상징이라는 타이틀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경기력, 예상보다 한참 더딘 성장 속도와 그로 말미암아 낙인찍힌 '역대 최악의 1순위'. 박정현은 그럼에도 조금씩 커나갔고 이젠 '상남동 라건아'라는 전혀 상반된 이야기를 듣는 선수가 되어가고 있다. 창원 팬들이 잠시 잃어버렸던 낭만을 그는 한아름 가득 안고 뛰어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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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번 시즌은 대안이 없을 각이고 팀 입장에선 팬들 보고 유대감을 줄 수 있는 선수를 끌어올려놔야 하니...
가망이 없으면 아무리 김준일이 다쳤어도 기회를 못 받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