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글챌린지 이스라엘, 미래가 있는가? - 박노자

저는 블라디미르/제에브 자보틴스키 (1880-1940)라는 시온주의 사상가의 저작을, 대학 2학년 때 만났습니다. 그 전에 소련에서 금서이었던 그 책들은, 그 때 처음 해금돼 읽을 수 있게 됐습니다. 처음에 읽었을 때에는 제 충격은 상당했습니다. 자보틴스키가 창립한 민병대 방식의 수정주의 (극우파) 시온주의 조직인 "베타르" (בית"ר)는, 엄격한 군사 규율, 폭력에 대한 수용과 장려, 그리고 상명하달식 조직 운영 방식을 그 특징으로 했습니다. 자보틴스키의 말 하나 하나를 보면, 꼭 동아시아 역사를 공부하는 저로서 연상이 되는 것은 조선의 해방 직후의 족청이나 서북청년단, 그리고 중화민국 시절의 극우 비밀결사인 남의사 (藍衣社) 같은 조직들의 강령들입니다. "민족 본위의 삶", "민족 지상주의", "지도자에 대한 복종"부터 시작해서 "타민족에 대한 기본적 태도로서의 무관심"까지, 뭘 하나 봐도 "해방적 근대"의 이상과 한 참 차이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 건국 전후의 이스라엘의 정계에서는 자본틴스키 계열의 극우 민족주의자들은 소수파이었습니다. 다수는 "노동 시온주의", 즉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한 "민족 사민주의자"들이었습니다. 지금 반대로, 자본틴스키의 계열이라고 할 수 있는 네타냐후 등의 범우파 진영은 거의 완벽한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겁니다. 국회에서 좌파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7% 안팎이고, 나머지는 범우파나 종교주의, 초종교주의 등입니다. 한데 시온주의 좌-우 사이의 모든 갈등, 모순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한 가지를 공유해 온 겁니다. 바로 "우리 민족만의 국가"의 이상이라는 거죠.

소수자 (팔레스타인 아랍인, 드루즈인, 베두인 아랍인 등)들도 시민권을 가지지만, 오로지 "우리 민족"의 구성원만이 이스라엘로의 "귀환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굳이 그렇게 이야기하자면, 일본이 일계인 (닛게이진)에게, 그리고 한국이 해외 동포에게 각각 주는 특권과 같은 논리, 즉 '혈통'의 논리죠. 문제는, 해외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다수의 다민족 국가에서는 "우리 혈통의 소유자"만을 뽑는 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러시아만 해도, 저를 포함해서 유대인 디아스포라라는 것은 상당부분 '혼혈인'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동포"들을 식별하는 한국 정부처럼, 이스라엘 정부도 현실적으로는 4조부모 (모계, 부계 조부모 4명) 중에서는 한 명이라도 종족적으로 내지 종교적으로 유대인이라면 그 "귀환"을 허용합니다. 한데 "핏줄"을 골라내는 이 방법은, 꼭 1930년대 후반의 독일을 연상케 하는 만큼 세계에서 의아함을 산 지 오래 됐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우리 핏줄만을 위한 국가"는 결국 노동시장의 서열화와 협소화를 의미합니다. 국가의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는 "종족적 유대인"들은, 결국 그런 권리가 없어 주로 농장이나 공사장을 전전해야 하는 외국인 노동자나 팔레스타인 노동자 등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한데 동시에 "종족"만을 내세우는 논리는 이스라엘 경제의 핵심인 하이테크에서의 외국 인재 영입 등을 또 어렵게 만듭니다. 세계의 우수한 인재들은 미국에 가면 가지, "핏줄"에 매딜리는 폐쇄 사회로 과연 뭐하러 가겠습니까?

그야말로 1930년대의 유물로밖에 안보이는 종족 본위의 사회의 기본 구조와 직결되어 있는 것은 바로 군사 부문의 과다 팽창과 전쟁, 폭력 중독입니다. 1인당 군사 부문 지출 (2,535달러)로 치면 이스라엘은 카타르 (3,379달러) 그 다음으로는 세계 최대의 기록을 보여주는 겁니다. 미국 (2,101달러)은 바로 이스라엘 다음입니다. 엄청난 돈을 군에 퍼붓는 것 이외에는 군사주의는 항상의 "총동원"의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사실, 지금만 해도 가자에서 벌어지는 인종청소 격의 '전쟁'에 동원되는 30만 명은 이스라엘의 유대인 총인구의 약 4%에 해당됩니다. 사회적 압력이 너무나 강한 만큼, 다른 데에서 흔하디흔한 병역 내지 동원 기피는 이스라엘에서 거의 불가능합니다. 한국 (아니면 미국)과 참 다르게, 지금 가자에서 전투를 벌이는 군인들 중에는 이스라엘 대통령의 아들도, 교통부 장관의 딸도, 복지부 장관의 아들도, 경제부 장관의 딸도 다 포함돼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스라엘에서 "(유대계) 시민"은 동시 "군인"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한데 이와 같은 절대적 동원의 논리는 동시에 폭력과 죽임에 대한 절대적 수용도 의미합니다. 예컨대 가자지구 등에 대한 여태까지의 정기적 공습이나 포격 등을, 이스라엘에서는 흔히 "잔디 깎기"라고 표현하곤 했습니다. "잔디를 깎는 것처럼" "대담해진" 하마스 등의 조직원들을 정기적으로 조금씩 죽인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런 공습마다 하마스 조직원들과 함께 아이, 여성, 노인을 포함한 민간인들도 계속 끔찍한 죽임을 당하곤 합니다. 한데 이에 대한 공감 능력을, 이스라엘 사회가 거의 가지지 않습니다. 평상시가 늘 전쟁이라면 "저쪽의 손실은 늘 우리에게의 희보"라는, 야만 그 자체인 원칙은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핏줄", 영구화된 전쟁, 군사 동원, 그리고 타자를 향한 무제한적 폭력에 대한 무제한적 수용을 그 본위로 하는 사회는 과연 미래가 있는가요? 아시아나 아프리카, 중남미에서는 물론이거니와, 구미권 시민 사회에서도 이스라엘은 가면 갈수록 '고립'돼 갑니다. 해외 유대인 사회 안에서도 이스라엘의 인종 청소 정책 등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가면 갈수록 높아집니다. "전쟁"의 대명사가 된 혈통주의의 종주국 이스라엘에 가고자 하는 세계 인재들이 그다지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해외 유대인도 최소한의 선택만 주어진다면 이스라엘로의 "귀환"을 대개 사양합니다. 다른 선택지가 없으면 이스라엘로 가는 것이죠. 1930년대의 유물 수준의 이데올로기를 지금도 "국시"로 삼는 나라는 과연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까요? 결국 이스라엘의 미래가 "평화"에 걸려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인과의 평화적 해결이 가능하다면, 시대착오적 군사주의나 초민족주의 이데올로기 등을 벗어날 희망이라도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궤도를 계속 따라가면 최소한의 희망조차 없는 것입니다.

 

 

[출처] 이스라엘, 미래가 있는가?|작성자 박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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