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어떤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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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있었던 일이다. 경찰서에 할머니 한 분이 들어오신다. 거동이 불편하신지, 유모차를 끌고 매우 느린 속도로. 연세가 지긋해 보이셨다. 유모차 안에는 웬 공병이 가득 차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냐고 여쭤봤다. 경찰서에서 나오라고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아주 희미한 목소리여서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본래의 출입 절차대로라면 방문 신청서를 적어야 하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글씨를 쓰기 어려워 보이셨다. 보안상의 이유로 이렇게 해서는 안 되지만(특히 코로나 상황 때문에) 재량껏 이름과 방문 목적만 듣고 들여보내드리려고 했다. 그러나 실제 들리지 않는 건지, 안 들리는 척을 하는 건지 나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으셨다. 그냥 오라고 했다는 말만 계속 중얼거렸다. 난처했다.

 

그 순간, 이 분을 전에 한번 뵌 것 같은 기억이 스쳤다. 불과 몇 개월 전이었다. 그때도 왜 왔는지 일체 말씀을 안 해주셔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마침 교대시간이어서 다음 근무자에게 맡겼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허리가 지금처럼 굽지 않으셨고, 어느 정도의 의사소통은 됐기에 못 알아봤다. 여러 번 오신 걸 보니, 분명 무슨 일은 있는 것 같았다. 강력계 사무실에 할머니를 모시고, 한 형사님께 부탁드렸다. 왜 왔는지 말을 안 해주는데 좀 도와달라고.

 

그렇게 그 할머니를 떠맡기고, 밀린 민원인들을 상대하느라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강력계 사무실에서 나오는 할머니의 모습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담당 형사님께 자신이 얼마나 불쌍하냐면서, 어떻게 좀 못 봐주냐고, 강한 어조로 따졌다. 알고 보니 그 할머니는 수개월 전 한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적발되었고, 몇 달 전에 조사를 받으러 출석한 것이었다. 형사님께서는 그 할머니의 사건은 이미 검찰로 넘어가 경찰에서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허탕을 처서 화가 났을까, 씩씩거리면서 유모차를 끌고 나온다. 나와 마주쳤다. 180도 달라진 모습을 나에게 보인 그 할머니는 아차 싶었는지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며, 경찰서를 빠르게 빠져나갔다. 그 할머니의 유모차에 담긴 공병은 아마도 자신이 이렇게 힘들게 사니 선처 좀 해달라는 일종의 장치였던 것 같다. 또, 그렇게 잘 말할 수 있는 데도, 나에게 끝까지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일종의 자기방어기제였을까. 자신의 죄를 입 밖으로 꺼내는 게 부끄러워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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