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칼럼 [레전드돌아보기]Rey León(사자왕) Gabriel Batistuta - 3편 늙은 사자의 퇴장, 그리고 남은 로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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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전 드리는 말씀-

-커뮤니티 가입한지 얼마안된 신입입니다. 잘부탁드리며 앞으로 시간나는대로 아래의 두개의 정규시리즈를 연재할 계획입니다.

-제가 직접본 레전드들은 [레전드돌아보기]

-저 역시 보지 못한 레전드들에 대해선 [레전드바로보기] 

-이 시리즈는 단순히 스탯이나 결과만 고려하는게 아니라, 레전드들의 세세한 스토리를 파고들어 보다 심층적으로 레전드선수, 그리고 그 당시 축구계를 돌아보자는 의의에서 시작했습니다.

 

 

*시리즈 지난칼럼*

[레전드돌아보기] Roberto Baggio 1편 

[레전드돌아보기] Roberto Baggio 2

[레전드돌아보기] Gabriel Batistuta 1편

[레전드돌아보기] Gabriel Batistuta 2편 

 

[레전드바로보기] 펠레편 

 

 

 

 

 

 

 

 

 

 

8.세리에 초원에 돌아온 사자, 위용을 떨치다.

 

 

 

94-95시즌은 그야말로 세리에의 위상이 절정에 달했던 시즌이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부터 굉장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세리에였지만, 그간의 명성으로 인해 수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이 이탈리아로 향했고, 우리가 아는 소위 명문이 아닌 팀들도 굉장한 경쟁력을 갖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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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95시즌의 유럽 전체 클럽 ELO 레이팅, TOP 16의 9팀이 세리에팀이다. 18팀이 50위안에 모두 존재했다.

 

 

 

세리에의 칼리아리 아래에 뮌헨이 존재했다는게 지금 두 팀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믿을 수 없는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세리에의 위상은 위의 자료처럼 당시 가장 경쟁적인 리그였습니다.

 

이제막 B에서 올라온 피오렌티나에게 만만치 않은 부대였습니다. 하지만 피오렌티나 역시 아무런 준비없이 시즌을 맞이하지 않았습니다.

 

에펜베르크가 계약시즌을 마치고 다시 고향인 독일로 돌아갔지만, 피오렌티나는 벤피카의 떠오르는 유망주영입에 성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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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골든제네이레션의 중추, 천재 플레이메이커 후이 코스타의 영입.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고전적인 10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이 천재 선수의 영입은 피오렌티나를 단숨에 세리에에서 가장 경쟁력있는 팀으로 만들었습니다.

세계에서 손꼽힐 수 있는 10번 후이코스타와 당대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올라선 바티스투타와의 조합은 확실한 패턴을 구축했기 때문입니다.

 

강팀으로서 가장 필요한 부분중 하나가 그 팀에서 가장 확실한 공격패턴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인데, 후이코스타의 합류로 이 패턴이 완성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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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후 6년간 피오렌티나, 그리고 세리에에 손꼽히는 공격라인, 바티 - 후이 코스타 콤비

 

후이코스타 같은 걸출한 선수도 영입하며 시즌준비를 착실히한 라니에리 감독과 피오렌티나.

 

이탈리아 건너온 뒤 가장 내실있는 프리시즌을 보낸 팀과 함께한 바티스투타는 이러한 상황에서 절정에 다다른 자신의 폼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칼리아리전에서 시작한 바티스투타의 골폭풍은 이후 11경기 동안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는 새로운 기록이었죠.

 

바티골은 세리에 전반기에 Eizo pascutti의 32년전 기록(10경기 연속골)을 새롭게 경신한 것입니다. 이때 바티스투타는 2선에 후이코스타에게 오는 스루패스를 원터치로 벗겨내고 강력한 슈팅으로 로 마무리하는 모습을 곧잘 보여주었습니다.

 

바티스투타의 존재가 있었지만 세리에B에서 갓 올라온 피오렌티나는 여전히 강력한 강등후보였지만, 바티스투타의 이러한 엄청난 활약에 힘입어 10위라는 중위권에 안착하고, 바티스투타는 26골을 몰아치며 이탈리아에서도 자신이 최고의 스트라이커라는 것을 증명해냅니다.

 

이당시 이탈리아에서의 최고는 유럽, 그리고 세계에서 최고라는 말과 다름없었습니다. 

 

그리고 바티스투타는 이러한 활약과 함께 90년도 중반-00년초반까지 세계최고의 스트라이커이자 스타로 발돋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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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에 달하는 장대한 기골, 휘날리는 장발과 남성미 넘치는 외모와, 그런 이미지에 걸맞게 선굵은 야성미 넘치는 플레이를 구사한 바티스투타.

 

 

 

 

94년도 이후 바티스투타의 플레이는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축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기가 다른 선수들에 비해서 늦었기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아르헨티나 선수들과 같은 탄탄하고 감탄이 나오는 턴치와 기본기는 없었던 바티스투타였지만, 스트라이커는 볼을 가지는 포지션이 아니었고, 바티는 다른 운동을 통해서 다져진 경험과 육체를 십분 활용했죠.

 

 

원터치로 자신이 슛하기 좋게 준비를 하고 이어지는 강력한 대포알 슛은 세리에 팬들에게 흔하게 볼수있던 장면이었죠. 또한 드리블같은 기본기는 부족했지만 자신의 강력한 육체적능력을 활요한 움직임 역시 역동적인 멋이 있었습니다. 자주 보지 못하는 장면이었기에 다들 좋아했죠. 

 

 

물론 90년대 초중반까지 바지오, 호마리우의 시대였고, 그 이후엔 호나우두가 급격하게 떠올랐지만, 바티스투타 역시 그 사이에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죠. 

동료 후이코스타 역시 지단, 베론, 즈보니미르 보반 등과 세리에를 대표하는 플레이메이커가 되었구요.

 

지금 피오렌티나의 팬들에게도 이시기를 그리워하는 분들이 정말 많습니다.

 

 

 

9.마침내 달성한 스쿠데토, 그러나 사자왕의 눈물.

 

바티골의 활약은 계속됬습니다. 

그리고 98월드컵에선 자메이카전 헤트트릭을 달성해 역사상 유일한 두개대회 헤트트릭 보유자로 등극하고 숙적 잉글랜드를 물리치고(베컴덕..) 8강에 올라갔죠.

 

물론, 대표팀의 주축이자 중심이던 천제 오르테가(진짜 아까운재능..)의 자멸로 아르헨티나 역시 히딩크감독과 베르캄프의 네덜란드에 4강을 양보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맞이한 98-99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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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시즌 초반, 드디어 우리가 기억하는 기관총 세레머니를 선보이는 바티스투타. 밀란전 헤트트릭이다.

 

 

바티스투타의 발끝은 뜨거웠습니다. 호나우도가 지난시즌 충격적인 실력을 선보이며 세계를충격으로 몰아넣었지만, 월드컵 이후 제컨디션이 아니었지만 바티스투타의 활약 덕분에 세리에는 여전히 화제거리가 넘쳐났습니다.

 

전반기에 17경기동안 17골을 넣은 바티스투타는 그야말로 스트라이커가 무엇인지 보여주었습니다.

 

그 터프하고 수비축구의 본고장에서 농구에서의 포스트업마냥 강력한 힘으로 수비를 등지기도하고, 틈을노려 파고들기도 하는 등. 강력한 피니쉬 이외에도 현대축구의 스트라이커가보여줄 수 있는 모습을 빠짐없이 보여주었으니까요.

 

그러나 이어지는 밀란과의 2차전에서 부상으로 바티스투타는 빠지게 되고, 순항하던 피오렌티나는 결국 리그 3위에 그치게 됩니다. 아마도 피오렌티나 팬들에게 가장 아쉬움이 남는시즌이었을 겁니다.

 

또한 맨유와의 챔스에서 역시 당대 잉글랜드 최강 맨유에게 득점력을 과시하며 당대 잉글랜드인들에게 98년 월드컵 이후 다시금 악몽을 선사해줍니다. 맨유가

이때만해도 트레블을 달성할 거라는 예상은 누구도, 심지어 퍼거슨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게 바티스투타는 98-99시즌 21골로 아쉽게 득점 2위로 어떤 타이틀도얻지 못했지만, 유럽무대에서의 좋은 활약, 세리에에서의 여전한 활약등을 인정받아 

히바우도, 트레블의 베컴에 이어 발롱도르와 올해의선수 3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팀원들과 다음시즌을 기약했죠. 하지만, 이 당시 세리에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80년대 중반 이후 호황을 맞이한 세리에, 그러나 호황으로 생성된 과도한 거품으로 인해 재정적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80년대 중반 이후 떠오른 세리에의 영향에 경제력은 절대적인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잉글랜드의 헤이젤 참사이후 몰락,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외환위기를 비롯해서 80년대 후반 90년대초반 유럽 주요국의 경제가 큰 위기가 찾아왔지만, 이탈리아는 한걸음 빗겨나 있는 상황이었으며. 오히려 90년대까지 세계 7위의 경제대국으로까지 성장합니다.

 

거기에 남미의 경제적 몰락과 더불어, 90년대에는 남미와유럽의 탑클래스 선수들이 거의다라고 해도 좋을 만큼 세리에로 향합니다.

 

당시 세리에는 이탈리아의 경제호황에 더불어 돈이 가장 풍부한 리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지금의 유럽축구시장처럼 매년 월드레코드가 세리에에서 나왔으며 굴리트와 반바스텐, 마테우스 등을 비롯한 세계 최고의 선수들도 세리에로 몰렸습니다. 

하지만 자연스레 호황에는 거품이 생성되기 마련이며 이는 90년대 말 00년대에 큰 작용을 합니다.

 

과도한 몸값거품이 생겨나고 구단들의 경쟁은 심화되고 자연스레 재정은 위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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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00시즌의 마지막 경기까지도 바티스투타와 선수들은 이게 바티와 피렌체와의 동행이 마지막이 될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체키고리 구단주는 재정 파탄을 그동안 막아보려 애를 썼지만, 이미 손을 쓰기엔 늦은 시점이었죠. 결국 팀의 주장이자 3시즌 넘게 리그에서 20골 넘게 넣어주고, 팀역사상 최다골의 주인공의 판매를 결정합니다.

 

팀의 강등에도 남아있던 바티스투타는 이번에는 팀의 존망을 위해 이적을 선택하고요..

 

매물로나온 31세의 스트라이커 파리나 날릴 상황이지만, 그것이 바티스투타라면 사정이 조금 달랐습니다. 수많은 세리에 팀들과 해외팀들, 특히 잉글랜드 구단에서 바티스투타에게 맹렬한 구애를 보냈습니다.

 

실제로 퍼거슨감독과 맨유는 바티스투타를 굉장히 탐내했습니다. 

 

하지만 사자는 다른 사자무리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맨유나 유벤투스와 같은 챔피언들이 나를 원했었지만, 언더독인 로마에 더 매력을 느꼈다." 

 

훗날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 말한 것 처럼 완성된 강팀이 아닌 언더독을 선택한 바티스투타는 로마로 향하게 됬습니다.

 

91년부터 2000년까지 보라색의 유니폼을 입었던 피렌체의 예수가 Giallorossi를 입은 것이죠.

당시 이적료는 우리나라돈으로약 400억이었으며, 30세이상 선수 이적료로서는 역대최고였습니다. 훗날 보누치와 호날두에게 깨지기전까지 상당시간 오랜 기간 유지된 이적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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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청부사 카펠로, 그리고 로마의 상징 토티.

 

카펠로와 토티, 알다이르, 카푸등이있는 로마는 바티스투타의 합류로 우승후보로 떠올랐습니다.

 

트레콰티스타로서의 토티의 기량이 절정으로 치닫고 견고한 카펠로의 전술에 더해진 농익은 바티투스타의 결정력이 더해진 로마는 강력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맞이한 피오렌티나와의 첫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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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스투타는 이날 결승골을 넣는다.

 

 

 

 

그리고 98년의 호쾌한 기관총 세레머니를 기대했던 홈팬들에게, 바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좋아하는 동료들의 환호성 속에서도 얼굴을 굳힌채 멍하니 둘러쌓일 뿐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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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왕은 골을 넣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거라곤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는 것 뿐이었다.

 

 

185의 장신과 탄탄한 몸, 호쾌한 스타일 강력한 힘. 거기다 남성적인 외모로 뭇 남성팬들의 로망으로 자리잡았던 바티에게서 볼 수 없던 우는 모습은 실망이 아니라 수많은 팬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더없이 상품화된 프로스포츠에서 많은 것을 남긴 장면이었습니다.

 

당시 저 역시 이 장면을 보고 눈시울이 붉어졌던 기억이 납니다.

 

"나 자신에게 프로 선수로서의 모습을 강요했다. (피오렌티나전) 눈물은 내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그때는 로마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이탈리아 칼치오 메르카토의 인터뷰에 따른 바티스투타의 회고입니다. 언제까지나 피오렌티나의 유니폼으로 프로이고 싶었던 바티의 심정이 잘나타낸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해 바티스투타는 끝까지 최선을 다하며 20골을 세리에에서 넣으며 득점 4위, 그리고 로마에서 자신의 첫 스쿠데토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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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마지막 경기 2위 유벤투스를 2점차로 따돌리고 첫 스쿠데토를 따내는 바티, 그리고 로마.

 

 

하지만 바티의 행운은 여기까지 였습니다. 

 

 

 

 

 

 

10.모든 것이 무너진 아르헨티나, 그리고 늙은 사자의 황혼.

 

 

과거 바티스투타를 축구의 길로 이끈 78월드컵, 그러나 독재정부의 낭비로 인해서. 아르헨티나는 이후 2번이나 국가 디폴트를 겼었고, 바티가 첫 스쿠데토를 품에안았던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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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는 다시한번 디폴트 선언을 한다. 78년 이후 세번째 국가 디폴트였다.

 

조국 아르헨티나는 절망속에 빠져들어버립니다. 

 

그런 조국의 상황을 알았던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바티스투타를 중심으로 똘똘 뭉치며 남미예선에서 그야말로 가공할 성적을 보여주면서 월드컵 진출을 확정짓습니다.

 

비엘사의 아르헨티나는 그야말로 우승후보 '0'순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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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엘사와 바티스투타, 초년의 감독과 유망주로 만난 두 사람은 명장과 스타선수로 재회한다.

 

 

그러나 바티스투타와 비엘사의 아르헨티나는 한일월드컵 죽음의조에 걸리고 말죠. 

2002한일 월드컵 F조에는 아르헨티나, 바이킹 스웨덴, 슈퍼이글스 나이지리아, 그리고 숙적 잉글랜드가 함께였습니다.

당시 기준 피파랭킹 2위(아르헨), 10(잉글랜드), 15위(스웨덴), 40위(나이지리아)가 한조에 있던 것이죠.

 

하지만 우승후보 0순위 아르헨티나를 이끌던 바티스투타의 다짐은 결연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도 우리에겐 축구가 있다."

 

당시 월드컵을 앞둔 바티스투타의 말이었습니다. 

얼마나 그가 조국 아르헨티나를 사랑하는지 알수 있는 말이었죠.

 

거기다 전문가들역시도 죽음의조이긴 하지만, 아르헨티나의 성적이 워낙 좋았기에 죽음의조마저 무난하게 올라갈 것이라는 예상이 팽배했죠.

 

 

첫경기 나이지리아전, 바티스투타의 멋진 헤더가 골로 이어지고 그대로 경기가 종료되며 1:0의 승리를 챙긴 아르헨티나는 지난 포클랜드 전쟁의 원수 잉글랜드를 만납니다. 잉글랜드 역시 프랑스 월드컵에서의 악연이 있었기에 벼르고 있는 상황이었고, 당시 주심은 외계인 콜리나 심판.

 

원더보이 오언은 멋지게 심판을 속이며 페널티를 얻어내고, 베컴이 골을 성공시키며 그대로 경기는 종료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스웨덴전에서 잉글랜드전의 통한의 패배의 후유증 덕인지 그대로 비기며 아르헨티나의 조별예선 탈락이 확정됩니다.

 

나이지리아는 일찌감치 1무 2패로 탈락됬고, 아르헨티나는 1승 1무 1패를 기록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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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전 이후 울음을 참지 못한 바티스투타.

 

 

그대로 아르헨티나는 조 3위로 월드컵에서 탈락이 확정되었습니다.

국가파산이라는 중차대한 위기속에서 어렵사리 여비를 마련해 지구반대편으로 날아온 몇안되는 아르헨티나 국민들을 향해 고개를 들 수 없었던 선수들은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주자앉아 울음을 터뜨려야 했습니다.

 

바티의 울음은 지난시즌 자신의 친정팀 피오렌티나를 향해 쏟은 눈물과 다르게 멈추지 않고, 너무나도 구슬프게 울었습니다.

 

33세 사자왕의 황혼은 그렇게 눈물속에, 막을 내립니다.

 

그리고 바티는 이 경기를 끝으로 영예로운  알비셀레스테의 마지막을 고합니다. 77경기 54골,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많은 골을 넣은 국가대표의 끝이었습니다.

 ㄴ 훗날 메시가 이 최다득점 기록을 경신합니다.

 

월드컵 이후 바티스투타는 이전시즌(2001-2002) 6골이라는초라한 활약을 만회하기 위해 다시 철저한 준비끝에 시즌을 맞이하지만, 부진을 면치 못하고 반시즌 이후 인테르로 이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즌 두팀 합쳐서 4골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2시즌 동안 10골이라는 초라한 득점을 기록한 늙은 수사자는 깨닫습니다.

 

이 초원에 이제 자신이 왕처럼 군림할 수 없을 거라는 것을, 그리고 우리의 바티골은 91년부터 13년간 활동했던 이탈리아에서 떠날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와 이야기하죠.

 

"고향으로 가보는건 어떻겠니?"

 

아버지가 말하는 고향이란, 아르헨티나가 아닌, 이민자이전 가문의 뿌리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탈리아계 바티스투타 가문이지만, 더 이전으로 뿌리를 타고간다면 오스만계 가문, 즉 아라비안의 피가 흐르는 가문이었습니다.

 

Gabriel 'Omar' Batistuta 라는 이름의 미들네임 'Omar'는 오스만계 혈통임을 나타내는 이름이었죠.

 

바티스투타는 2003년 카타르의 알아라비로 향합니다.

 

늙은 수사자라 하더라도 초식동물들이 있는 곳에선 여전히 포식자였고, 그는 18경기 25골을 넣으며 왜 바티스투타인지 카타르와 중동의 팬들에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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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에서 재회한 왕년의 동료 '에펜베르크'... 세월무상을 느끼게한다.

 

 

그리고 오는 2005년 월드컵을 앞둔 우리 바티골, 바티스투타는 미련없이 은퇴합니다. 그의 나이 36세였습니다.

 

알비 셀레스테를 위해 54골,

 

피오렌티나에서 203골, 

 

다른 팀에서의 수 많은 골을 합하면 총 346골이란 기록을 남긴채 사자왕은 축구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로마에서 33골, 이턴밀란에서 2골, 아르헨티나에서의27골, 카타르에서 27골 총 89골 + 203골 = 292골.

 

 

 

바티스투타의 멋진 외모와 마초적인 플레이는 90년대, 세리에와 전세계 팬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비록 그는 천재적인 플레이어는 아니었지만, 누구보다 본능적이며 야성적인 선수였습니다. 

 

반바스텐 이후 세리에를 대표한 9번이라고 할 수 있던 그는, 최근 아르헨티나의 공격수들과 달리 국가대표에서도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며 많은 알비 셀레스테의 팬들의 그리움이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바티스투타가 세리에를 떠난 시점에서 공교롭게 세리에의 7공주체제가 붕괴됬으니 세리에 팬들도 강하게 그리워 하는 선수이기도 합니다.

 

 

축구팬들을 감동시킨 그의 행동거지와 커리어자체만 보더라도 '사자'라는 말 자체가 그렇게 어울리는 선수가 또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사자무리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 자신의 사자무리를 원했던 바티스투타.

챔피언에 합류하는게 아니라, 챔피언과 싸우길 원했던 그의 발자취는 단순한 플레이 이상, 진정한 '사자'다운 행보였습니다.

현대축구에서 여전히 '로망'이 있을 수 있다는 것, 진정한 축구의 가치를 모두에게 을 몸소 보여준 바티골에게 다시한번 찬사를 보냅니다.

 

 

많은 80년대생 스트라이커들의 우상(수아레스, 카바니 등)이자, 원클럽맨이 아니더라도 누구보다 충성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바티스투타의 이야기를 통해 그가 남긴 90년대의 향기, 그리고 추억을 짧게나마 돌아본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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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바티스투타에 대한 소회

 

 

 

바티스투타의 경기를 본건 아버지덕분에 97년부터 곧잘 봤었습니다. 다행히 전성기를 접하기 충분한 시기였죠..

 

당시 바티스투타의 강력한 슛, 그리고 멋진 장발과 외모에 그를 좋아했었죠. 아마 바지오의 팀만 아니었다면 바티스투타를 응원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가장 바티의 향이 많이 나는 스트라이커는 카바니를 들 수 있는데, 공교롭게도 카바니의 우상이 바티였다고 합니다.

 

어린시절, 바티스투타인지 바티투스타인지 헷갈렸는데...ㅎㅎ 때론 바티스타라고 하기도하고...ㅎ

 

지금 아르헨은 여전히 엄청난 공격수들을 가지고 있는데(이과인, 아게로 등등) 바티스투타를 알비 셀레스테 역사상 최고의 9번으로 꼽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이과인, 아게로와 달리 바티골은 국가대표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고 트로피들을 안겼기 때문입니다. 

 

이후 크레스포 역시 안타까웠죠. ㅠ.ㅠ 좀만 늦게 태어나지...

 

초라한 팀커리어 덕분에 저평가당할 거라는건 바티스투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여러 인터뷰들을 보면)

그렇지만 그는 선택의 기로에서 챔피언으로의 합류가 아닌 경쟁을 택한 정말 사자처럼 살아온 것 같습니다. 거기다 그런 선택에 후회도 없다고 하니 대단합니다.

 

남자로서 다시한번 팬이될 수 밖에 없네요.

 

미숙한 글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려중인 다음 레전드

1.지네딘지단

2.알베르티니

3.스티븐 제라드

4.그외 추천바랍니다.

 

 

-어느덧 두번째 레전드를 마무리하네요. 펠레같은 고대시대 레전드들을 다룬 바로보기 시리즈 2탄 크루이프를 준비해야겠져???ㅠ.ㅠ

-코로나덕분에 집에서 못나가게 되서 오늘 부랴부랴 마무리 지었는데..ㅎㅎ 어쨌든 저의 부족한 글에 오탈자 지적이나 잘못된 정보가 있으면 지적바랍니다.

댓글 12

서윤경 2020.08.20. 21:14
저도 어렸을때 스포츠 기록 관련 서적에 바티투스타라는 선수가 두개의 월드컵에서 해트트릭에 성공한 선수로 기록이 되어있어서 바티스투타...바티스투타...하다가 시간이 지나고보니 웬걸 제가 바티스투타를 바티투스타로 잘못본거였던 추억이 있었네요...ㅋㅋㅋㅋㄲ

재밌게 읽었어요!
댓글
서윤경 2020.08.20. 21:14
 서윤경
그리고 9번단락에 두번째줄 두갣회→두개대회 오타나신것같아요
댓글
13aggi0 작성자 2020.08.20. 21:29
 서윤경
감사합니다!! 해당부분 수정하였습니다!
댓글
A.C.Milan 2020.08.20. 21:42
상남자 바티골ㅠㅠ
연재 감사합니다!
다음은 알베르티니가 좋을꺼 같아요!
1,3번은 너무 유명하니까
댓글
13aggi0 작성자 2020.08.20. 21:49
 A.C.Milan
밀란팬들에게는 더 특별한 레전드라고 할 수 있져 ㅎㅎ
댓글
A.C.Milan 2020.08.20. 21:51
 13aggi0
혹시 나중에 기회되신다면 로마의 레전드 토마시선수도 부탁드려도 될까요
2002년 월드컵에 뽀글이머리 신선햇는데ㅋ
댓글
13aggi0 작성자 2020.08.20. 21:55
 A.C.Milan
한일월드컵 이태리의 톰마시 말씀이시져? ㅎㅎ 언제한번 준비해 보겠습ㅂ니다. ㅎㅎㅎ
댓글
13aggi0 작성자 2020.08.21. 20:33
 rraccoon
감사합니다!
댓글
Gareth 2020.08.21. 19:34
좋은 글 감사합니다
댓글
13aggi0 작성자 2020.08.21. 20:33
 Gareth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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