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칼럼 [레전드바로보기]오렌지혁명가, 축구를 영원히 바꿔놓다.(크루이프편)

  • 13aggi0
  • 143
  • 8
  • 14

-읽기 전 드리는 말씀-

-커뮤니티 가입한지 얼마안된 신입입니다. 잘부탁드리며 앞으로 시간나는대로 아래의 두개의 정규시리즈를 연재할 계획입니다.

-제가 직접본 레전드들은 [레전드돌아보기]

-저 역시 보지 못한 레전드들에 대해선 [레전드바로보기] 

-이 시리즈는 단순히 스탯이나 결과만 고려하는게 아니라, 레전드들의 세세한 스토리를 파고들어 보다 심층적으로 레전드선수, 그리고 그 당시 축구계를 돌아보자는 의의에서 시작했습니다.

 

 

*시리즈 지난칼럼*

[레전드돌아보기] Roberto Baggio 1편 

[레전드돌아보기] Roberto Baggio 2편

[레전드돌아보기] Gabriel Batistuta 1편

[레전드돌아보기] Gabriel Batistuta 2편 

[레전드돌아보기] Gabriel Batistuta 3편 

 

[레전드바로보기] 펠레편 

 

 

 

1.서론

 

지난번 펠레편에서 축구황제 펠레는 어째서 축구황제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펠레 이후 우리가 비로소 현대축구라고 부를 수있는 다수의 변화들이 촉진이 되었으며, 선수보호제도에 대해서 협회가 신경을 쓰기 시작한 것이죠.

 

물론 실력적으로도 그시대와 윗세대의 선배들보다도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줬기 때문에 가능한 거였습니다.

 

펠레는 득점으로만 평가할 수없는 유형의 선수였습니다. 그가 자신의 현역시절과 가장 비슷한 유형으로 '메시'를 꼽았었는데요. 

축구를 보는 사람들이라면 메시가 골만 많이 넣어서 최고라는 칭호로 불리지 않는 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펠레가 들인 노동에 비해 많은 경기가 비공식이 되어서 기록이 소실되었어도 엄청난 스탯과 커리어를 자랑하는 것을 빌미로 그의 축구인생과 당대의 축구환경을 돌아보았습니다.

 

공격뿐만아니라 모든 포지션에서 월등한 활약을 보여줬던 펠레의 활약은 축구계에 많은영감을 불어 넣었습니다.

 

이탈리아에게는 수비적인 영감을, 그리고 축구의 변방이던 네덜란드에는 또다른 영감을 불어넣으며 새로운 시대를 촉진시키죠.

 

오늘의 주인공은 축구의 중심에 있던 이탈리아가 아닌 여태 변방에 지나지 않았던 네덜란드에서 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2. 알프레도 스테파노, 펠레. 육신에 토탈리즘을 품고 있던 지존들.

 

 

image.png.jpg

엄청난 명성만큼이나 모든 포지션에서 최상의 기량을 선보였던 두 선수 스테파노와 펠레.

 
 
50년대의 지존 저승사자 레알마드리드의 레전드 알프레도 스테파노, 60년대의 지배자 정복자 펠레 이 둘의 공통점은 올라운더 플레이어라는 것입니다.
전포지션에서 거의 최고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의 활약을 선보였는데, 펠레는 심지어 키퍼마저도 최고라고 부를 정도라고 하더군요.
 
포지션별 전문화가 지금시대에 비해 진전되지 않은 바도 있겠지만, 두선수의 축구지능이 상상을 불허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기술적으로도 어떤 포지션에서든 통할만한 비범한 수준에 도달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축구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중 하나인 멀티플레이어의 소질을 이역대 최고의 선수들은 반세기전에 지니고 있었던 것이죠. 
 
물론 이들과 같은 천재나 되어야 그런 능력을 보여줄 수 있었겠지만, 연달아 등장한 이 지존들의 플레이 많은 사람들이 찬탄을 보내면서도 의구심을 품게 됩니다.
 
"공격과 수비를 둘다 잘하는 저들은 경이롭다. 그렇다면 축구할 때 공격할때도 수비할때도 모두가 한다면 최강의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축구의 팀스포츠 전술에서 수의 우위는 언제나 중요한 명제로서 지배해 왔죠. 그러나 공격과 수비를 함 있어서 그 역할을 분담하는 것은 당연했고, 분업화야말로 인류가 진화하면서 얻은 효율적이지기 그지없는 사상적 산물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공격하고 모두가 수비한다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공상에 가까운 이야기였습니다. 이른바 입축구였죠.
 
이러한 이야기는 사실 펠레와 스테파노 이전부터 있어왔던 개념이었습니다. 
하지만, 스테파노나 펠레같은 몇몇 선수의 플레이를 제외한다면 그것을 팀단위 전술로 구현한다는 것은 여전히 공상이었지만, 그래도 이 토탈축구에 대한 환상은 과거부터 전술의 발전에 끊임없이 그 영향력을 발휘해 왔습니다.
 
 

image.png.jpg

토털풋볼의 기초를 제시한 축구인 Jimmy Hogan.
 
 
지미 호건은 번리 출신으로서 오스트리아 헝가리 지역에서 지도자로 활동한 축구인입니다. 덕분에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토털축구가 헝가리에서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 친구 Hugo Meisl과 함께하면서 분더팀으로 불리는 오스트리아 대표팀은 가장 원시적인 토탈풋볼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당대 최강의 팀중 하나였던 오스트리아팀은 제2회 월드컵에서 4강에서 이탈리아와의 대결을 펼쳤지만, 홈팀 이탈리아의 구타에 가까운 축구로 인하여 패배하게 되죠. 

 

이후 호건은 헝가리 오스트리아 스위스를 거쳐 다시 오스트리아로 돌아와 올림픽대표팀을 맡아 준우승까지 시키는 성적을 보여줍니다. 이후 이 위대한 토털리즘의 분화는 그가 지도자의 전성기를 보낸 헝가리에서 다시금 새로운 변화를 이끕니다.

 

*M-M전술, 토탈리즘을 향한 두번째 몸부림.

 

40년대 말, 지미호건의 축구를 보며. 영감을 얻은 헝가리의 축구인 부코비 감독이 당대의 유행 전술 WM을 뒤집어 MM전술을 만들어냅니다. 4-2-4의 전형이었죠. 이역시 센터포워드가 아래로 내려와 플레이하는 원시적인 형태의 펄스나인형태였고, 당연히 지미 호건의 오스트리아에 많은 영감을 얻은 전술이었습니다.

 

이를 받아들인 구스타프 세베스 헝가리 국가대표팀 감독과 함께 ELO 국가대표 역대 최고점수를 기록한 매직 마자르의 시대가 열립니다. 

이후 브라질 펠레의 등장으로 이탈리아에서는 카테나치오역시 이러한 변화의 한축을 담당합니다. 네레오 로코로 촉발된 카데나치오는 펠레의 산토스마저 인상적으로 잡아내는 모습을 보이며 새로운 전술의 지평을 열었고, 그란데 인테르의 에레라감독으로 인하여 지아친토 파케티라는 풀백의 공격가담, 즉 오버래핑이라는 최초의 개념을 선보이게 됩니다.

 

수비수의 수비만 한다는 고정관념을 카데나치오라는 수비적 전술혁명덕분에 탈피하게 된것이고, 이는 분명한 토탈리즘의 영향을 받은 전술적 진화였죠.

 

image.png.jpg

위대한 인테르(L‘a Grande Inter)의 위대한 주장 지아친토 파케티, 그의 공격가담(오버랲)은 대단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술적 진화를 지켜보고 있던 한 오스트리아인이 축구변방의 감독으로가게되면서 새롭게 시작됩니다. 

 

image.png.jpg

네덜란드역사상 최고의 패서 로 꼽히는 Hanegem, 폐에노르트의역사상 최고의 선수 Moulijn과 함께 있는 Ernst Hapel

 

 

지미호건의 오스트리아가 어떤축구를 보였는지 똑똑히 지켜본 오스트리아의 에른스트 하펠은 페예노르트에서 클럽 최고의레전드들과 함께 매직마자르를 계승한 축구로 네덜란드 최초로 유러피언컵을 들어올리고, 인터콘티넨탈 컵까지 들어올리며 우승을 차지합니다. 이때의 거의 원초적인 토탈풋볼이라고 할 수 있는 축구를 구사한 페예노르트를 보고있던 것은 라이벌 암스테르담의 아약스였습니다.

 

 

 

 

 

 

3.장군(General), 천재를 만나 전환을 이루다.

 

image.png.jpg

축구역사상 최고의 감독, 리누스 미헬스.

 

 

네덜란드는 오스트리아 대표팀이 진델라를 필두로 원시적 형태의 토털풋볼, 그리고 그것이 카데나치오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꾸준히보면서 자국축구에 적용시키며 연구해 왔습니다.

 

이미 1940년대 지미호건의 영향을 받았던 잭 레이놀즈 감독이 아약스의 지도자로 와서 지금의 아약스가 추구하는 토털리즘의 씨앗을 뿌려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영국권 감독의 사상을 이어받은 해리포츠라는 감독이 지미호건의 고향 번리로 돌아와 이런 축구로 잉글랜드 풋볼을 우승하죠. 

 

당시 해리포츠는 "where every player could play in every position"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는 이미 우리가 생각하는 토털리즘의 사상적 토대가 60년대에 구축된 것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당시 해리포츠의 말은 선수가 더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여주여야 한다는 취지에 가까웠지만 말이죠.

 

그리고 아약스의 레이놀즈 밑에서 스트라이커로 뛰었던 리누스 미헬스 역시 이러한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1965년 아약스를 맡은 리누스 미헬스는 다재다능한 것을 선수의 플레이에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팀이 추구하는 플레이 자체가 다재다능해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초기엔 어느정도 생각만 할 수있었지만, 그가 아약스의 감독이 되고나서 시니어팀에 데뷔한 어린 선수를 보고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image.png.jpg

건방진 애송이 johan Cruyff. 그는 리누스 미헬스의 철학에 고무되며 열렬한 지지자가 된다.
 
6살부터 아약스의 유소년 생활을 해온 크루이프는 64년 열일곱의 나이에 아약스에서 10경기 4골을 넣으며 그 재능을 뽐냈습니다. 그러나 64-65시즌 아약스는 13위라는 실망스러운 성적이었고, 자신이 원하는 축구가 아닌 것에 대해 크루이프는 큰 불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부임한 리누스 미헬스와의 만남은 아약스, 아니 세계축구사를 그대로 바꿔놓습니다.
 
전쟁시절을 겪고 군대를 겪은 엄격한 감독 리누스 미헬스는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로운 천재의 스테레오 타입에 해당하는 18살의 크루이프를 만나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것이죠. 
 
리누스 미헬스는 전술적으로 모두가 같이 공격하며 같이 수비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어린 크루이프는 이에 대한 해답으로 축구에 대한 직관력과 지능이라고 이야기를 내놓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생각했던 축구를 구현하지않고 생각으로 했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토털리즘을 구현하기 위해선 모두가 펠레 스테파노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들의 플레이는 흉내낼 정도로 개인능력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크루이프를 제외하면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킬 선수들은 없는 상황이었죠.
 
리누스 미헬스는 크루이프를 필두로 자신의 축구를 보여주기 위해 오랜시간 공들이지만 라이벌 로테르담의 페예노르트가 네덜란드 최초의 유럽챔피언 자리를 가져가면서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물론 평범하게 여기서 포기하고 끝났다면 혁명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리누스 미헬스는 라이벌 하펠의 로테르담의 강력한 체력으로 부터 나오는 축구를 보면서 자신들의 이론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깨닫습니다. 
 
"토털리즘을 위해선 기술과 축구지능이 필요하다!"라는 크루이프의 말은 절반만, 아니 크루이프에게만 해당되는 사실이었습니다. 크루이프정도의 지능인 선수가 흔할리 없었고, 부족한 지능과 기술을 보완하기 위해선 강력한 체력이 필요로했죠.
 
미헬스는 라이벌 하펠과 로테르담의 축구에서 배우고, 그동안 키워온 아약스의 선수들과 함께 다음시즌을 기다립니다.
 
 
 
 
 
 
4.유럽, 마침내 오렌지 혁명으로 물들다.
 
 
페예노르트의 유럽정복은 당시 축구변방 네덜란드로서 분명히 고무적인 성과였지만, 국가대항전에서의 위상은 여전히 변방의 국가였습니다. 그리고 리그 최고의 스타는 잘생기고 천재적인 플레이를 선보이는 암스테르담의 천재에게 쏠려있는 상황이었죠. 
 

image.png.jpg

67년 로테르담전에서 크루이프, 스무살의 앳된 얼굴과 멋진 플레이는 네덜란드를 열광으로 몰아넣었다.
 
 
젊고 잘생긴 천재는 자연스레 축구인기에 가속화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크루이프를 보기위해 수많은 팬들이 몰려든 것이죠. 네덜란드라는 자그마한 나라였지만 어린 크루이프는 어느새 최고의 유명인이 되어 있었고, 70-71시즌을 맞이해서 아약스는 놀라운 축구를 선보입니다.
 
크루이프의 천재성, 리누스 미헬스 감독의 철학대로 키워진 요한 네스켄스, 스터이, 아리에한, 케이저르, 수르비어와 같은 네덜란드올스타들과 함께 이 어린 아약스 선수들은 벤피카, 밀란, 레알마드리드와 같은 유수의 유럽명문들을 상대로 박살을 내기 시작합니다.

image.png.jpg

크루이프, 그리고 그의 장인이자 사업가인 코르 코스터
 
1971 - 73년까지 유러피언 3연패를 이루어내죠. 그리고 이 아약스의 중심 크루이프는 단연 유럽최고의 선수로 발돋움합니다. 그의 장인 코르 코스터는 사업가로서 스타플레이어의 흥행성을 알아채고 크루이프를 네덜란드 최고의 스타로 만드는데 일조한 사람이었고, 크루이프가 유럽을 제패한 시기에 이를 놓치지 않고 크루이프를 유럽최고의 스타로 만드는데 성공합니다. 이때 만들어진 기반은 아약스가 향후 최고의 명문으로 발돋움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죠. 
 
71년 선보인 토털리즘은 선수가 다재다능하게 플레이 하는게 아니라 팀 전체가 수비와 공격을 하는 충격적인 플레이를 선보였는데 지금보면 약간 동네축구같은 느낌도 있었습니다. 물론 당대 팀들은 그런 축구에 당황해서 정신도 못차리고 승부를 내주고 말았지요.
 
이 축구는 네덜란드에서도 충격이었는지 리누스에게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을 제의하고 리누스감독은 조국의 영광을 위해 71년 유럽을 제패한뒤 오렌지군단의 사령탑에 취임합니다. 이미 그가 모든 것을 만들어놓은 상황에서 이어 바통을 건네받은 명감독들도 무리없이 아약스를 연패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당시까지 축구변방으로 취급받던 네덜란드의 비상과 함께 23세의 크루이프는 유럽의 지존으로 등극합니다. 
 
그리고 73년 3월 7일 Olympisch, Amsterdam 유러피언컵 8강에서 크루이프는 운명적인 만남을 가집니다.
 
 
 
 
 
 
5. 혁명가 VS 황제, 70년대의 왕좌를 두고 경쟁할 운명의 상대 마침내 조우하다.
 
 
위대한 크루이프에게, 시대는 1인자의 이름을 허락하지 않았다. 혁명가는 곧, 혁명의 맞수 '황제'와 조우한다.
 
 
 

image.png.jpg

유럽의 제왕 요한 크루이프의 아약스, 그리고 전차군단의 황제로 이제막 즉위한 카이저 베켄바워의 운명적인 첫 만남.
 
 
상대는 역사상 최초의 발롱도르 수상자이자 꾸준하게 크루이프의 라이벌로 떡밥이 일던 프란츠 베켄바워의 바이에른 뮌헨이었습니다.
홈에서 열린 이 경기를 크루이프의 아약스는 뮌헨을 4-0으로 뭉게놓는 치욕을 안깁니다.
 
모든 선수들이 우르를 뛰어나가 공격진을 오프사이드로 만들고 공격할때역시 상대를 정신없게 헤집는 탓에 그 베켄바워조차 첫만남에는 큰 굴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 독일은 근대 철학을 이끌어온 나라답게 그 특유의 정신력으로 이 경기를 단순히 치욕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베켄바워역시 처음 상대하는 아약스의 토털리즘을 순식간에 간파하며 뮌헨의 홈에서 열린 2차전은 2-1로 갚아줍니다. 단 한경기만에 토털리즘에 적응해낸 카이저 베켄바워와 뮌헨의 승리는 아약스로서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1차전 대승에 힘입어 상위로 올라가고 결국 결승에서 인테르를 물리치고 레알마드리드 이후 3연패를 완성시키죠.
 
 
미헬스와 크루이프 축구계에 가장큰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토털리즘'을 완성시킨 사람들입니다. 이전에는 펠레, 스테파노와 같은 초인적인 능력에 의한 개인적 토털리즘, 그리고 70년대 브라질의 424까지 축구는 개인의 역량에 따라 토털풋볼과 가까운 축구를 했었다면, 리누스 미헬스와의 크루이프는 이러한 축구판의 기조를 바꿔놓습니다.
 
흔히 말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루어 놓은 것이죠. 너무나 비범해서 '짠'하고 모든 걸 바꾼건 아니었습니다. 토털리즘의 사상적 토대는 이미 20년대부터 시작되어 온 것이고, 많은 축구의 명사들을 거쳐 이뤄놓은 토양 위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모든 혁명이라 불리는 것들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image.png.jpg

산업혁명 역시 증기기관만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쌓여온 행정적, 사상적 토대위에 기술이 방점을 찍은 것이다.

 

 

 

메시와 호날두이전 이 최고의 라이벌의 만남은 이것이 시작이었습니다. 

 

 

73-74시즌 아약스는 마침내 유럽챔피언에서 내려왔고 그것을 차지한 것은 지난시즌 아약스를 상대로 패배했던 베켄바워의 뮌헨이었습니다.

 

수비수가 이렇게 돋보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베켄바워는 자신의 카리스마로 마침내 뮌헨을 독일의 첫 유럽챔피언으로 만든 것이죠.

72년 앙리들로네, 그리고 74년의 빅이어까지 완수한 베켄바워.

 

71,73년 발롱도르를 수상하며 자신이 더 우세한 것을 알린 크루이프.

 

결국 이 두 천재의 대결은 좀더 큰 무대에서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6.운명의 결전 1974년 서독 월드컵.

 

리누스 미헬스의 사상을 체득하여 직접 완성시킨 오렌지 '혁명가' 크루이프.

 

마찬가지로 토털리즘의 분화인 파게티의 오버랲을 통해 리베로 혁명으로 응수한 '황제' 베켄바워.

 

 

이 둘이 오늘날 메시 호날두와의 라이벌리와는 다른점은 이둘은 자웅을 겨룬 가장 중요한장소가 월드컵이었다는 것입니다.

월드컵은 물론, 챔피언스리그 결스에서도 맞붙지 못한 두사람과 다르게 이들은 세계최고의 무대에서 자신들의 조국을 이끌고 운명을 가르는 대결을 한 것이었습니다. 

 

크루이프에게 어떻게 보면 서독은 참 묘한 상대였습니다.

20년전, 당대최강의 매직 마자르 헝가리는 전후 신음하던 서독의 영리한 축구에 무너지며 월드컵을 내줘야 했고 이후 월드컵 우승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매직마자르의 전술적 후계자는 누가봐도 서독이 아닌 크루이프의 네덜란드였습니다. 천재적인 재능만큼이나 자신감으로 똘똘뭉친 크루이프는 대회에 임하며 자신은 과거 헝가리와 다르게 독일에 무릎꿇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74년 서독 월드컵을 맞이합니다.

 

 

리누스 미헬스와 아약스에서 함께 완성시킨 토털리즘은 지난 3년간 오렌지군단에 잘 녹아든 상태였고, 조별리그 3조에서 우승후보 우루과이를 2대0으로 관광보내는 것을 시작으로 압도적인 경기력을 선보입니다. 물론 서독역시 반대편 조에서 서독이 동독과 함게 무난히 1라운드를 통과했습니다. 하지만 서독은 라이벌 동독에게 석연찮은 패배로 인해서 조2위로 진출이었죠. 이걸로 조편성은 완전히 변화하게 됩니다.

 

 

image.png.jpg

조1위 네덜란드의 2라운드 A조, 1위로 마무리해야 결승전으로 향한다. 우승후보 브라질, 아르헨티나가 눈에 띈다.

 

image.png.jpg

동독과의 충격패는 잊은듯 서독은 B조에서 양민학살을 선보인다. 물론 경쟁자들이 상대적으로 수월하기도 했다.

 

 

펠레가 은퇴한 브라질이었지만, 지난 역사와 카리스마 그리고 강력한 실력을 가진 팀이었습니다. 

히벨리뉴, 자일징유같은 스타 플레이어들이 건재한 상황이었습니다. 지난 70년대회와 다른 점은 펠레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큰 차이였죠.

 

 

지난 대회에서 펠레와 함께 신의 축구를 선보였다고 평가받았던 브라질을 맞붙어서 크루이프는 2대0 완승을 기록합니다.

물론 브라질의 강력한 공세가 운이 나빴던 것도 있지만, 전술적으로나 축구변방 네덜란드의 플레이는 신시대의 상징 그자체였습니다.

 

미리보는 결승전으로 점쳐진 브라질과의 명승부를 승리로 장식한 크루이프와 네덜란드는 결승으로 향했고, 

 

그곳엔 반대편에서 수월하게 결승에 진출한 홈팀, 베켄바워의 서독이 있었습니다. 

 

image.png.jpg

월드컵이란 결승에서 다시보게된 두 양웅, 황제와 혁명가라는 상반되는 별명을 가진 두 선수가 주장으로서 치열한 승부를 다짐한다.
 
 
크루이프의 네덜란드는 대회내내 홈팀 서독을 누르고 최고의 팀이었습니다. 
크루이프의 천재성과 그들의 멋진 토털풋볼의 위력이었죠. 물론 서독에선 자국 대표팀의 선전이 가장 큰 화제였지만 세계적으론 지난대회 챔피언 브라질을 누른 크루이프와 네덜란드에 주목하고 있었죠.
 
마치 20년전 54년 헝가리와 독일처럼요.
 
대회 시작 후,
 
크루이프의 질풍같은 돌파로 페널티를 얻어내고  네덜란드가 선취골을 넣으면서 1대0으로 앞서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네덜란드는 여태 대회내내 보여준 유기적인 움직임의 토털풋볼을 선보이며 서독을 옥죄여 가지만 상대는 리베로 혁명을 완성시킨 '황제' 베켄바워였습니다.
 
포지션을 구분짓지 않고 유기적인 공격을 보여주는 네덜란드의 토털풋볼을 최후방의 프리롤 베켄바워는 자신을 최고로 이끈 이 리베로 시스템을 통해서 실수없이 통제해 냅니다.
 
리베로와 같은 프리롤은 선수역량에 따라 그 플레이의 수준이 결정되는데, 이미 크루이프의 토털리즘을 경험한 베켄바워는 당황하지 않고 진중하게 판다하며 자신의 지배력을 확장시키며 네덜란드의 파상공세를 무력화 시킵니다. 그야말로 황제의 지배력이 잘 나타낸 예였죠. 
 
그리고 독일엔 베켄바워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칸바워와 독일은 아무리 유기적인 움직임인 토털풋볼이라도 뇌 역할을 하는 중추가 있을 것임을 파악했고 당연하게도 그 중추이자 두뇌는 크루이프였습니다. 
 
1966년 베켄바워가 당대최강 잉글랜드의 보비 찰튼을 맨투맨으로 무력화 시켰다가 베켄바워의 지배력을 잃었던 경험을 반면교사삼아 이번에는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image.png.jpg

묀헨 글라트바흐의 전설적 수비수 베르티 포그츠와 베켄바워, 그리고 크루이프.

 

 

아무리 크루이프가 특출났다고 하더라도 당대 최고의 수비수중 한명인 포그츠의 맨투맨을 뚫고 활약하기란 버거웠죠. 게다가 상대 베켄바워는 맨투맨을 하기가 힘든 최후방에서 날뛰고있었습니다.

 

 토털풋볼의 엔진이자 두뇌 크루이프의 봉쇠령을 완벽히 수행한 포그츠, 그사이 베켄바워는 그 네덜란드를 자신의 늪에 빠트리며 허우적 거리게 만듭니다.

얼마안가 서독은 다시 PK를 얻어 뮐러가 성공시켜 동점을 만든뒤, 전반 종료직전 다시 게르트 뮐러의 역전골을 성공시키며 판을 반전시킵니다.

 

네덜란드역시 네스켄스, 아리에한 수어비어같은 당대의 선수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베켄바워의 지휘아래 서독대표팀에게 그대로 묻혀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후반전 역시 베켄바워의 손바닥안에서 논 네덜란드 대표팀은 그렇게 자신들의 첫 월드컵 우승에 실패하고 맙니다. 

 

축구역사상 최고의 혁신을 불러일으킨 그들의 여정은 여기까지였습니다.

 

 

그러나 토털풋볼의 유행시킨 네덜란드의 크루이프는 그해 74년 당시로선 전무후무한 3번째 발롱도르를 수상하며 자신이 최고임을 증명해냅니다.

 

아마 상대 독일의 리베로가 베켄바워 수준의 리베로가 아니었다면 네덜란드는 수월하게 독일의 방패를 부쉈을 것입니다. 불행히도 아니면 다행스럽게도 상대는 최고의 라이벌 베켄바워가 있었죠.

 

이후 크루이프는 대회 MVP를 수상하고 사람들은 최고의 팀과 최고의 선수인 크루이프가 우승했어야 한다며 말을 했었습니다.

 

물론 베켄바워는 "강한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긴자가 강한것이다."라는 말로 멋지게 응수합니다. 그야말로 독일과 베켄바워의 정신이 잘 녹아있는 말이었죠.

 

 

70년대 카데나치오 혁명도 펠레의 브라질에 무너졌지만, 네덜란드의 토털풋볼 혁명 역시 베켄바워앞에 무너지고 맙니다.

 

공교롭게도 상대는 축구황제라는 이명을 지닌, 펠레와 베켄바워였죠. 혁명가들이 성공했다면 혁명가로 그치지 않았을 테니 어떻게 보면 다행이겠죠?(아닌가요?ㅋㅋ)

 

월드컵 이후, 크루이프는 은사 리누스 미헬스가 있던 바르셀로나에서 활약하며 우승컵을 선사하고 베르나베우 참사를 선사하며 바르셀로나에서도 전설이 됩니다.

 

그리고 78년 여전히 절정이던 그는 아르헨티나 월드컵 불참을 선언합니다. 사람들에겐 아르헨의 독재정부에 반항하는 의미에서의 불참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가족들의 납치로 인해서 가족과 떨어질 수 없었기때문에 네덜란드 대표팀에 합류할 수 없었던 것이죠. 물론 네덜란드는 강했습니다만, 부패한 월드컵 중하나인 78년 아르헨 월드컵에서 다시한번 아르헨에게 승리를 내주고 맙니다. 

 

그렇게 네덜란드의 첫번째 황금세대는 막을 내리고 이후 크루이프도 선수 말년을 보내게 됩니다. 

 

 

 

 
 
7.불완전한 혁명으로 완벽한 혁명가로 남다.
 
 

image.png.jpg

84년 페예노르트에서 마지막을 고하는 혁명가, 그의 선수생활은 막은 내리지만 그의 혁명은 계속된다.
 
 
 
전에 말했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일으킨 네덜란드의 크루이프는 전과 후에 있을 축구 지존들과 다르게 혁명가라는 전무후무한 닉네임으로 불립니다. 이는 그가 축구계에 선수로서 가장큰 전환을 일으킨 명예로운 증거인데요.
 
저는 축구에서 3번의 대전환이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1925년이후), 카테나치오혁명, 후에 이탈리아에서 다시 일어나는 압박혁명, 그리고 그 사이에 크루이프의 토탈리즘입니다.
 
모든 축구사 전환에 있어서 가장큰 사상적 전환은 크루이프가 만든 토털리즘입니다. 그 이전에 토털리즘의 대한 것은 있어왔고, 부분적으로 전술에 영향을 미치며 존재한 것이지만, 크루이프는 전술전체적으로 이끌어낸 것이죠. 
 
말 그대로 축구사의 대전환 중 가장 강렬한 전환이 리누스 미헬스와 크루이프라는 선수로인해 완성된 것이죠. 
월드컵 1회 출전 3골에 불과한 크루이프가 이름값에 비해 부족한 성적을 가지고도 혁명가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성적을 넘어 영원히 지속된 대혁명을 이끈것에 기반한 것입니다.
 
그래서 라이벌 베켄바워에게 패했을지라도 선수로서의 위상은 크루이프가 당대에 높았던 것은 이러한 이유였습니다. 게다가 실질적으로 발롱도르 3개로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기도 했구요.
 
펠레의 뒤를 이어 축구황제란 대관을 위해서 필요했던 월드컵정상에서의 결전, 역사의 가정은 없지만 어쩌면 크루이프의 네덜란드가 우승했더라면 혁명가 크루이프는 혁명에 성공하고, 나폴레옹처럼 "황제"에 올라, 펠레와 마라도나를 저 아래에 두는 영원한 정상에 올랐을 지도 모릅니다. 
 
황제와 혁명이라는 양립할 수 없었던 두 이름에서 결국 크루이프는 혁명가로서의 이름으로 만족하게 됩니다.
 
이후, 혁명이라는 진보성에 매몰된 나머지 자신의 축구관에 옳지 않으면 비하하는 고집스러운 면이 보이지만, '결과없는 과정은 무의미하고, 과정없는 결과는 지루하다'라는 그는 결과와 과정은 모두 중요시하는 축구를 추구하는 만큼, 위대한 직관력은 은퇴뒤에도 바르셀로나에서 발휘되죠.
 
잘 아시다시피 우리가 알고있는 크루이프즘을 바르셀로나에 심어주며 그들의 철학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것이죠. 
 
베켄바워의 리베로 혁명은 결국 시대의 흐름이 바뀌면서 사라지고, 크루이프즘은 여전히 주류로서 남아있기에 그런 것일지 모르지만.
 
크루이프가 월드컵에서도 패배했음에도 베켄바워와 나란히 70년대를 양분한, 어쩌면 한발자욱 더 앞에서 이름을 불리는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것은 그의 이러한 혁명과 축구사적 영향력 때문입니다.
 
그는 축구사에 있어서 점진적 발전이 아니라 그간의 포지션과 역할의 분업이라는 틀을 부수어내고 '토털리즘'이라는 하나의 시대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전무후무한 '혁명가' 크루이프라고 부릅니다. 
 
 
 
 
 
 
 
*후기
드디어 고심했던 크루이프의 축구전반기를 다뤄봤습니다.
 
솔직히 전술사적으로 유명한 크루이프의 치적을 돌아보기 위해서 어떤식이 좋을까라는 고민을 했습니다.
 
이전 '펠레'편에서는 우리에게 낮선 펠레시대의 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전달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초점을 잡았다면, 펠레이후 크루이프에 대해선 그가 정점을 맞이하는 74년 월드컵까지의 여정을 초점으로 잡았습니다.
 
 
70년월드컵에서 최초의 교체, 최초의 레드카드가 생겨났고, 이미 60년대 초반 펠레와 같은 선수들을 막기위한 카데나치오 쓰리백이 생겨나 아주리의 카데나치오 혁명은 68년 유로우승으로 증명된 상황이었죠. 물론 펠레와 브라질은 아주리의 카데나치오 혁명의 역량을 아득히 초월한 것이었고, 결국 펠레 자신의 이름을 축구사의 가장 첫번째에 새기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두번째 주인공 크루이프는 베켄바워라는 라이벌이 존재했습니다. 마치 펠레의 영광은 베칸바워에게, 천재성은 크루이프에게 간것같은 느낌이었죠.
 
사람들이 크루이프의 토털리즘은 잘 알지만 그것이 어떻게 생겨난 것이고,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 다들 모르는 분들이 많은 것 같더군요. 그래서 저는 크루이프의 초반부에 힘을 많이 줬습니다. 
 
사상적 대 전환이라는 혁명은 0-100으로 갑자기 가는게 아니라 99까지 쌓아온 것에 누군가 1을 더하는 것이니까요. 그 1의 위치를 크루이프가 했던 것이고요. 
 
이렇게 60-70년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레전드들과 축구사적 발전덕분에 우리가 현대축구라는 산물을 향유할 수 있었던 만큼, 여러분들에게 과거의 레전드들이 어떤식으로 위업을 달성하고 몰락해 나갔는지 잘 전해지셨다면 좋겠습니다.
 
솔직히 크루이프편을 쓰면서 메시가 많이 생각났습니다. 최고로 불리는 선수였지만 최고의 영광은 누리지 못했거든요. 다만, 그렇다고 누구도 그를 최고라고 인정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지요... 그래서 크루이프가 메시를 많이 아꼈나봅니다...ㅎㅎ
 
이제 70년대 초 크루이프의 대전환을 다뤘으니, 이제 마찬가지로 수비축구에서 가장 큰 헤게모니 중 하나인 '리베로 혁명'을 일으킨 베켄바워를 다룰 수 있겠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8

A.C.Milan 2020.08.22. 01:22
뮌헨 글라드바흐가 아니라 묀입니다~
진짜 크루이프랑 메시랑 많이 닮았네요ㅋㅋ
댓글
13aggi0 작성자 2020.08.22. 13:26
 A.C.Milan
감사합니다. 수정하였습니다.
댓글
김수윤 2020.08.22. 02:00
항상 칼럼 감사합니다. 보르도 전반 끝나면 볼게용 와드!
댓글
13aggi0 작성자 2020.08.22. 13:26
 김수윤
언제나 관심가지고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13aggi0 작성자 2020.08.22. 13:26
 청정수
재밌게 봐주셔서 기쁘네요 감사합니다!
댓글
13aggi0 작성자 2020.08.22. 13:27
 서윤경
저두 감사합니다 항상 좋해 주셔서 ㅎㅎ
댓글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이벤트 해축백일장 수상작 발표 (8, 9회차 공동) 3 Giallorossi 281 9
이벤트 야근에 찌든 이벤트 주최자로 인해 또 시작되는 파리 올림픽 승무패 이벤트(~7/24 22:00) 4 Giallorossi 5297 11
츄또공지 해외축구갤러리 츄르토토 규칙+츄사장 명단 3 Giallorossi 1664 11
공지 CHUGGU 해외축구갤러리 공지사항 20240615 1차 개정판 42 강미나 10338 56
인기 [Fotmob] 이강인, 리그앙 기회 창출 2위 히꼬작가 29 4
인기 션다이치는 인수후에도 에버튼에 남고싶다는 의지를 분명히했으며 2 Lumine 22 4
인기 오늘 현지에서도 이강인 인상깊었나보네 1 히꼬작가 28 3
축구칼럼
이미지
프리드 124 14
축구칼럼
이미지
강미나 385 34
축구칼럼
이미지
varclub 481 9
축구칼럼
이미지
호날두 178 4
축구칼럼
이미지
두줄풋볼 235 5
축구칼럼
이미지
두줄풋볼 233 6
축구칼럼
이미지
두줄풋볼 521 6
축구칼럼
이미지
호날두 188 7
축구칼럼
이미지
두줄풋볼 172 4
축구칼럼
이미지
호날두 208 10
축구칼럼
이미지
호날두 170 5
축구칼럼
이미지
호날두 186 6
축구칼럼
이미지
호날두 260 9
축구칼럼
이미지
뚜따전 304 20
축구칼럼
이미지
프리드 264 24
축구칼럼
이미지
뚜따전 406 5
축구칼럼
이미지
호날두 210 3
축구칼럼
이미지
호날두 267 4
축구칼럼
이미지
호날두 375 14
축구칼럼
이미지
포르테 266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