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칼럼 코스타리카의 축구 영웅 #1 - El Mago, 알레한드로 모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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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적인 플레이로 뛰어난 득점력을 보여준 코스타리카의 공격수'라고 하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파울로 완초페를 떠올릴 것이다. 완초페가 2000년대 유럽에서 이름을 날렸다면, 이로부터 70년 전인 1930년대 유럽에서 이름을 날린 코스타리카인 공격수가 있다. '마법사' 알레한드로 모레라이다.
 
알레한드로 모레라 소토는 1909년 7월 14일 코스타리카의 알라후엘라에서 태어났다. 알라후엘라를 대표하는 구단인 LD 알라후엘렌세에서 축구를 시작한 모레라는 어린 나이부터 두각을 나타낸 천재였다. 1925년, 16세라는 아주 어린 나이에 알라후엘렌세 1군에 데뷔하게 된다. 힘나스티카를 상대로 데뷔전을 가진 모레라는 10대 중반이라는 나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경기력을 보였고, 팀의 주전으로 거듭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모레라가 활약한 알라후엘렌세는 1926년 코스타리카 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게 된다. 한순간에 알라후엘렌세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로 부상한 모레라는 데뷔 2년차, 17세의 나이로 팀의 주장을 맡는 등 팀 전체의 무한한 서포트를 받는 선수였다.
 

훗날 알라후엘렌세의 상징적 선수가 된 모레라


센세이셔널한 어린 선수의 등장에, 다수의 해외 클럽이 모레라의 영입에 관심을 보였다. 알라후엘렌세에서 2시즌간 47경기 39득점이라는 경이로운 스탯을 쌓은 모레라의 몸값은 치솟았고, 1927년 쿠바의 센트로 가예고라는 구단이 모레라의 영입에 성공하게 된다. 당시 미국인들의 투자를 등에 업고 경제 호황을 누리던 쿠바에서는 축구 팀들도 부를 누리고 있었고, 재력을 바탕으로 초대형 유망주의 영입에 성공한 것이다.

모레라는 1927 시즌 쿠바에서 19경기 21골이라는 훌륭한 경기력을 보였고, 아르마다 컵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하지만, 어린 선수로서 타지에서의 생활이 어려웠는지 1시즌만에 센트로 가예고를 떠나게 된다. 잠시 포르투나 아바나 소속으로 투어에 참가한 모레라는 알라후엘렌세 복귀를 택한다. 고국으로 복귀한 그는 여전히 에이스이자 스타였다. 모레라가 이끈 알라후엘렌세는 1928년 팀 역사상 첫 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이 시즌 모레라는 26득점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오른다. 그의 코스타리카 리그 폭격은 이후 시즌에도 이어졌다. 비록, 당시 코스타리카 리그는 초창기였고, 수준이 높지 않은 리그였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모레라가 1928년부터 1932년까지 알라후엘렌세에서 기록한 144경기 136득점 기록은 가히 대단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1930년을 전후해, 코스타리카 내에서 에레디아노가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기에, 모레라와 알라후엘렌세는 1928년 리그 우승을 제외하면 우승컵을 들지 못했다. 하지만 상위권의 성적을 기록하던 알라후엘렌세는 북중미와 남미의 여러 나라로 투어 경기를 다니기도 했다. 이 경기들에서 모레라는 멕시코, 페루 등의 구단을 상대로 좋은 경기력을 보여준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명성을 얻은 모레라는 1933년 2월, 스페인 구단인 RCD 에스파뇰의 입단 테스트에 초대받게 된다. 엘살바도르 출신으로 에스파뇰과 카탈루냐 국가대표에서 뛰던 히카르두 사프리사가 모레라를 에스파뇰 구단에 추천한 것이다.

에스파뇰의 입단 테스트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입단에 성공한 모레라는 첫 3경기에서 3득점을 기록했다. 에스파뇰의 새 스타가 탄생하는 듯 했지만, 난데없이 모레라가 에스파뇰의 지역 라이벌인 FC 바르셀로나에서 뛰게 될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모레라가 코스타리카에서 스페인으로 오는 배를 바르사 관계자들과 탑승했고, 그 안에서 계약에 합의했다는 것이다. 결국 모레라는 에스파뇰에서 단 3경기만을 뛰고 1933년 5월, 6천 페세타의 이적료로 바르사에 입단한다.
 

바르샤에서의 모레라


모레라는 바르사 데뷔전인 테네리페전에서 멀티골을 기록하며 자신의 실력을 증명했다. 입단 첫 시즌인 1933/34 시즌, 레알 마드리드의 전설적인 골키퍼 리카르도 사모라를 상대로 득점을 기록하기도 하는 등 총 41득점을 기록하며 팀 내 최다 득점자가 되었다. 비록 이 시즌 바르사는 리그 9위의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모레라의 큰 공헌으로 카탈루냐컵을 들어올리는데 성공했다. 꾸레들은 모레라에게 "El fenómeno costarricense(코스타리카의 경이로운 자)"라는 별명을 붙이며 그에게 무한한 지지를 보냈다.

그 다음 시즌인 1934/35 시즌에도 모레라의 활약은 이어졌다. 24경기 12골의 성적으로 팀을 리그 6위에 올려놓았다. 이때 모레라는 카탈루냐 지역 대표팀 소속으로 두 경기를 뛰기도 했다. 두 경기 모두 브라질과의 경기였고, 모레라는 두 경기 모두에서 득점을 올렸다. 모레라의 활약에 꾸레들은 그를 더 보고싶어 했지만, 현재까지 그러는 것처럼 바르사 구단 수뇌부는 팬들의 바램을 깨트렸다. 승격팀 허큘레스 알리칸테가 1만 페세타의 이적료를 제시하자 그 제의를 수락하며 모레라를 내준 것이다. 바르사 팬들은 크게 분노했지만, 모레라는 이미 허큘레스로 떠난 뒤였다.

허큘레스에서 모레라는 단 한 시즌밖에 소화하지 못했다. 1935/36 시즌 한 시즌간 18경기 9득점을 올리며 팀을 리그 5위에 올려놓았지만, 시즌 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며 스페인을 떠나게 되었다. 허큘레스를 떠난 모레라는 고국 코스타리카로 복귀해야 했다. 하지만 스페인의 상황으로 인해 은행에서 출금조차 하지 못하게 되어, 그의 비상금을 상자에 숨겼으나 상자를 분실하여 국제 미아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때 손을 내민 구단은 프랑스의 르 아브르였다. 르 아브르는 그가 교통비를 마련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교통비를 마련해 줄테니 팀에서 2경기만 뛰어 달라는 요청을 한다. 모레라는 이 제의를 흔쾌히 수락했고, 2경기에서 2득점을 올렸다. 팀과 본인에게 윈-윈이 되었던 이 경기들 이후 모레라는 1936년 11월, 고국으로의 복귀와 동시에 친정팀 알라후엘렌세로 이적한다.

모레라가 알라후엘렌세로 복귀하며, 그는 국가대표팀에서도 뛸 수 있게 되었다. 차범근이 독일로 진출하며 국가대표 경기를 뛰지 못했던 것처럼 모레라도 스페인으로 진출하며 국가대표에 소집되지 못하였고, 그 이전에는 어리다는 이유로 국가대표에 차출되지 못하였지만 1938년, 코스타리카 국가대표팀은 모레라를 선발하며 그에게 자랑스러운 모국의 국가대표 선수로 뛸 기회를 주었다. 이때 코스타리카는 중앙 아메리카&카리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비록 당시 국가대표 경기가 많지 않아서 모레라는 커리어 통산 국가대표로 단 7경기밖에 소화하지 못했으나, 그 경기들에서 6득점을 기록하는 좋은 활약을 펼쳤다.
 

수비수 사이에서 득점을 노리는 모레라


알라후엘라에서도 모레라는 당연하게도 좋은 활약을 이어나갔다.16세의 나이에 등장한 신성은 27세의 전성기를 누리는 선수가 되어 팀을 이끌었고, 1928년 코스타리카 컵 이후로 트로피를 들지 못했던 알라후엘렌세는 그가 복귀하자마자 다시 트로피를 들어올릴 수 있었다. 1937년 코스타리카 컵을 우승한 것이다. 역시 모레라는 어나더 레벨이었다. 1939시즌부터 모레라는 플레잉 코치 역할을 맡으며 뛰게 된다. 23득점을 기록하며 리그 득점왕에 오른 그는 리그 최종전 에레디아노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알라후엘렌세의 11년만의 리그 우승을 완성시켰다.

1941년은 모레라 커리어 최고의 한 해였다. 코스타리카 국가대표팀의 선수와 감독을 겸하며 CCCF 컵 우승을 차지한 모레라는 알라후엘렌세에서도 중요한 트로피를 두 개 들어올렸다. 리그와 컵 더블을 달성한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는 32세였고, 시대를 감안하면 많은 나이임에도 정상급 기량을 유지했다. 알라후엘렌세에서 팀의 리더로 뛴 모레라는 1944년 코스타리카 컵 득점왕을 차지하였고, 1945년에는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선수보단 감독 역할에 치중한 그는 1947년 4월 6일 무니시팔 리마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선수 커리어를 마무리짓는다.

모레라는 1936년 알라후엘렌세 복귀 이후 11년간 364경기 312골을 기록하였고, 알라후엘렌세 통산 555경기 487득점을 기록한 알라후엘렌세 최고의 선수였다. 쿠바와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에서의 기록을 합하면 673경기 584득점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이다.

모레라는 165cm의 키로, 신체 조건은 불리했지만 특유의 날렵하고 리듬감 있는 드리블로 상대 수비수들을 무력화시킨 선수였다. 훌륭한 골 결정 감각을 가진 선수로, 킥에도 특출난 선수였다. 공격진 어느 위치에서든 잘 뛰었던 모레라는 진정으로 'El Mago del Balón(공을 다루는 마법사)'라는 별명이 어울리는 선수였다.

선수 커리어를 마무리지은 모레라는 1949년까지 알라후엘렌세 감독을 맡았고, 감독직 은퇴 후에는 고향에 있는 자신의 농장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러던 중 1958년, 알라후엘라의 상징적인 인물임을 인정받아 알라후엘라 주의회 의원으로 추천된다. 마리우 에찬디 정부에서 1962년까지 주의원으로 활동한 모레라는 1966년부터 1970년까지 알라후엘라의 주지사까지 맡았다. 주지사를 역임한 것을 마지막으로 커리어맨으로서의 인생을 마무리지은 모레라는 1995년 뇌동맥경화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알라후엘렌세와 코스타리카의 상징적인 선수였던 모레라를 기리는 의미에서, 알라후엘렌세의 홈구장은 '에스타디오 알레한드로 모레라 소토'라 이름붙여졌다. 모레라는 그 경기장의 동쪽 스탠드 밑에 묻혀 있으며 그의 동상도 건립되어 있다.
 

에스타디오 알레한드로 모레라 소토


코스타리카 축구 초기의 영웅이자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던 천재 공격수 알레한드로 모레라.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유럽 커리어가 끊기지 않았다면 전 세계의 축구 팬들이 기억하는 인물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비록 유럽에서 커리어가 일찍 마감된 것은 아쉽지만, 그는 알라후엘렌세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 되었고, 코스타리카인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댓글 4

임여진 작성자 2021.10.14. 16:25
 유월낙공
더비랑 맨시티 등에서 뛴 선수 있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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