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프리뷰/리뷰 선수들이 더는 신데렐라로 남지 않았으면 : 여자축구 대한민국:아이티전 리뷰

 78일 있었던 여자축구대표팀의 출정식 아이티전은 직관을 갔던 경기 중에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멋있었다

선수들은 선제 실점에도 불구하고 지칠 줄 모르고 뛰는 모습으로 역전승하며 경기장에 있던 모두에게 큰 선물을 안겼다. 대한축구협회는 다른 분야에서의 계속되는 실책과는 다르게 행사 기획과 흥행 면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다. 그런 내부의 노력이 모여 외부에 전해진 건지, 만 명에 가까운 관중들이 경기장을 채우며 제대로 응답했다. 모든 게 제대로 맞아떨어진 경기였다. 그리고 그런데도 마냥 즐거워하기는 어려웠다. 조금 슬프기도 했다. 
 곧 개막하는 여자월드컵을 맞아 그날 상암벌의 기억을 꺼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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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대표팀 선수들에겐 너무 먼 서울월드컵경기장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의 여자 국가대표팀 경기는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다. 이 경기 전에 상암에서 있던 여자 A매치는 무려 2013년에 있었던 북한전까지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평소에 관심을 많이 받지 못하는 것이 흥행 여부의 문제로 이어지고, 이게 상암 같은 큰 구장을 대관하는 데에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과거 두 번의 월드컵 출정식은 경기조차 갖지 못하고 실내 행사로 치러지기도 했다.(2015년 광화문 KT 올레스퀘어 드림홀, 2019년 강남 스타필드 코엑스몰 라이브프라자) 서울에서 여자 A매치가 열리는 것도, 국가대표 출정식으로 초청전을 치르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여자축구를 보지 않아도 이름을 알 에이스 지소연은 "역대 최다관중을 기대한다, 그만큼 좋은 경기 보여드리겠다"며 월드컵 본선이 아닌 최종 모의고사에 큰 의지를 드러냈다. 

 

 그러나 현실은 쉬워 보이지 않았다. 경기가 얼마 남지 않았던 시점에서 예매분이 2천여 장 팔렸다는 기사를 봤다. 육안으로 볼 때 많아야 300명 정도가 오는 듯하고 공식 관중 집계를 보기도 어려운 WK리그를 생각하면 2천 명도 정말 많은 관중이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서울에서 하는 A매치고 선수들 또한 그보다 뜨거운 분위기를 기대한다는 걸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했다. 염치불구하고 K리그 응원팀 커뮤니티에 글을 남겨봤다. 오늘 장거리원정인데 못 가시는 분들은 원래 우리 홈인 서울월드컵경기장에 가는 거 어떻겠냐고. 십 년에 한 번 오는 기회 놓치지 말고, 평소 여기서 뛰기 힘든 선수들의 간절함을 알아주자고. 원정 경기가 있어 비판받는 거 아닌가 싶어 고민도 했지만 2천 장이라는 숫자와 그에 비해 훨씬 큰 꿈을 드러낸 지소연의 인터뷰가 겹쳐 보이니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이번에 준비 열심히 했네"

 "선수들의 간절함이 느껴져 X장 예매하고 갑니다"

 

 그 글로 2천 명이란 숫자에 더해진 건 두세 명 정도뿐이겠지만, 따듯한 반응에 예감이 좋았다. 집에서 경기장도 멀지만 글을 쓰고 샤워하고 나왔더니 그런 말들이 있어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경기 전 : 준비하는 이들의 노력이 느껴졌던 상암벌의 공기

 

 같은 구장에서 경기를 해도 공기가 다르다는 걸 느낄 때가 있다. 분위기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 이 경기장의 공기는, 관중의 열기로도 달라지고 주최 측의 경기장을 어떻게 꾸미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수원FC와 수원FC위민은 똑같이 수원종합운동장을 쓰지만 두 가지 면 모두에서 위민 쪽이 차갑다, 식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람이 많지 않아서, 경기장이 상대적으로 휑해서. 그런 느낌을 가장 자주 가는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도 똑같이 받게 될까봐 가면서도 불안했다.

 

 날씨는 많이 더웠지만 상암을 찾는 사람들은 결코 적지 않았다. 역을 나서기 전부터 지소연 마킹을 한 유니폼을 입고 오신 팬 분이 보였고, 북측광장 부스도 생각보다 훨씬 많이 운영되고 있었다. 올해 들어 국내축구에 유입되는 공기가 많이 달라졌는데 그것이 비로소 여자축구에도 미치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한쪽 부스에선 클럽이 연상되는 경품 추첨 팔찌를 나눠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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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게 있다는 것 자체로 노력을 많이 했구나 싶었다. 축구장에서 힙함을 논하는 것도 신선했고, 주목받기 쉽지 않았던 경기에 즐길 만한 분위기를 선사하기 위해 내놓은 아이디어라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팔찌는 경기장 분위기의 완벽한 복선이 되었다.

 

 더위를 뚫고 경기장에 입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선수단이 입장했고, 공식 워밍업을 시작했다. 보통 워밍업 시간대엔 클럽송을 틀어주고 큰 이벤트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날은 달랐다. 경기 포스터에서 등장을 예고했던 AOMG 레이블의 일원 DJ 스프레이가 W석 한가운데 설치된 디제잉 부스를 통해 워밍업에 쓰이는 곡을 직접 믹싱해서 플레이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쿵쿵 울리는 앰프가 이질적으로 느껴지긴 했지만,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음악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는 스스로를 보면서 팔찌와 디제잉 같은 것들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축구협회와 오버더피치, AOMG 같은 함께 준비한 회사들은 오늘 경기를 페스티벌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십 년만의 상암 여자 A매치는 그 자체로 축하할 만한 일이고 선수들 또한 그동안 쉽지 않은 조건에서 운동하고 대회를 앞두고 힘든 훈련을 소화했던 상황에서 분위기를 띄우고 갈 계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의미있는 경기를 축제로 만들고픈 많은 이들의 마음이 보이는 경기장 분위기였다. 그날 상암의 공기도 다른 때와 많이 달랐다. 더 신나는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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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수들도 웃으면서 경기를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듣고 보기만 하는 관중들도 이렇게 신나는데, 정말 오랜만의 서울 경기에서 흥이 나라고 판을 까는 분위기로 응원을 받은 선수들은 얼마나 신이 났을까. 걱정하면서 갔지만 다행히 좋아할 수 있는 모습이 많았다. 

 

 

경기 : '고강도'는 결코 허풍이 아니었음을

 

 많은 면에서 걱정을 씻어준 경기장의 후끈한 공기를 즐기다 보니 킥오프 시간이 다가왔다. 관중도 점점 늘어나 E석의 60% 정도가 채워졌다. 선수들이 입장하고 스크럼을 짤 때 휑한 구장 의자가 아니라 그곳을 채운 팬들을 볼 수 있다 생각하니 더없이 기쁜 마음이었다. 큰 구장을 쓰면 허전하고 작은 구장을 쓰면 아예 동네 레포츠공원과 비슷한, 관중석이 있는지도 알기 힘든 인조잔디 구장인 WK리그를 생각하면 괜시리 울컥하는 장면이었다. 상암에서의 대형 태극기와 애국가, 많은 팬들 앞에서 치르는 경기. 누군가에게 당연할 수도 있는 장면을 다른 누군가는 평생 한 번의 꿈으로 삼을 수도 있다는 게 슬퍼서 울컥했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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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경기가 시작된 뒤엔 다른 의미로 걱정이 쌓였다. 아이티는 왜 이렇게 잘하는 걸까. 시작부터 상대를 몰아친 건 역사에 남을 축제를 벌인 대한민국 대표팀이 아니라, 초청받은 아이티 대표팀이었다. 강한 피지컬과 빠른 역습을 통해 위협적인 장면을 계속해서 만들어낸 아이티는 20분이 지나기도 전에 선제골을 뽑아내며 자신들이 본선에 갈 자격도, 남의 잔치에 들러리를 서지 않을 자격도 있다는 걸 보여줬다. 첫 골 이후에도 아이티는 계속해서 '딸깍'으로 찬스를 만들고 간담이 서늘해지는 슛을 보여줬다. 신체조건이 대략 비슷한 K리그에서의 빠른 역습도 위험하다고 느껴지는데 체격도, 속도도 한국보다 뛰어나 보이는 아이티 선수들이 반복적 역습을 선택하니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콜린 벨 대한민국 감독은 경기 후 "우리보다 빠른 선수들을 어떻게 막느냐가 본선에서 중요하고, 그것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평가전의 의미에 걸맞는 상황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전반전은 운도 대한민국에게 안 따라주는 편이었다. 주장 김혜리가 수비 도중 경미한 부상을 당해 전반을 마치고 교체됐고, 골키퍼까지 제친 최유리의 슛은 그 뒤에 있던 수비수가 몸을 던져 막아냈다. 분위기는 좋았는데 경기가 버겁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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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그렇다고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상암에서의 한 경기는 일단 선수들에게 의미가 컸다. 팬들도 수원과 용인에서 열렸던 두 번의 잠비아전과 이전 A매치에 비해 훨씬 많았다. 국가대표팀에서 경기 내용이 안 좋을 땐 "나라를 대표해 뛰면서 이렇게 하는 게 부끄럽지 않냐"고 성질도 낸다던 지소연의 인터뷰집이 떠올랐다. 전반 끝나고 자리를 많이 채운 팬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그 마음을 알 것 같아서 박수를 크게 쳤다.

 

 그러나 후반에는 양상이 완전히 변했다. 이날 투입 시점부터 끝까지 한 번도 뚫리지 않았던 홍혜지가 들어갔고, 골키퍼도 김정미에서 윤영글로 바뀌었다. 왼쪽 센터백을 맡던 심서연은 오른쪽 풀백으로 이동했다. 그 뒤로는 대한민국이 주도하는 양상이 만들어졌다. 수비진의 안정감이 상대 공격수가 박스까지 치고 올라와도 불안하지 않을 정도로 좋아졌다. 측면 역습은 거의 차단할 수 있었고, 뒤쪽에서 버티는 힘이 생기니 앞으로도 거침없이 나갈 수 있었다.

 

 경쟁력 있는 상대를 만나 45분 내내 고전한 대한민국 대표팀은 결국 후반이 시작되고 6분 만에 표정이 밝을 수 없는 패배의 불안에서 축제의 현장으로 돌아왔다. 조소현이 페널티 박스 안에서 상대 수비에게 파울을 얻었고, 지소연이 깔끔하게 성공시킨 것이다. '최다관중에 들어차도 이상하지 않을 멋있는 경기 보여드리겠다'고 약속한 지소연은 자신의 골로 약속을 지켰다. 이후에도 대한민국은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후반 내내 공격 작업으로 전진하며 상대를 위협한 것이다. 이날 가장 중요한 장면을 장식한 장슬기는 콜린 벨 감독의 '고강도' 훈련을 두고 "입맛이 떨어질 정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라는 코멘트를 남겼는데, 그것이 헛되지 않음을 증명하듯 대한민국 선수들은 지치지 않았다. 더 좋은 피지컬과 스피드를 가진 아이티 선수들은 점점 한국 선수를 따라가거나 제치는 걸 어려워했다. 그 틈을 타 대한민국은 계속 막힐지언정 상대 골대 인근에서 볼을 다루는 시간을 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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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소연의 골로부터 30분이 지나 경기장에 있는 모두가 또 하나의 골을 보고 일어섰다. 장슬기의 중거리슛이 그대로 역전골로 이어진 것이다. 장슬기의 인터뷰에 의하면 '너무 셌'던 지소연의 패스를 받고 자세를 잡더니 먼 거리임에도 주저없이 슛을 선택했고, 이게 골대 우상단을 통과하며 대한민국은 승리의 기회를 잡았다. 골 네트와는 가까워지는데 상대 골키퍼의 장갑에서는 점차 멀어지는 완벽한 골. 어떻게 이런 슛을 때릴 수 있는지 어안이 벙벙할 정도의 골이었다. 응원을 그리 많이 하지 않던 W석 사람들조차 모두가 장슬기를 연호했다. 

 

 80분이 넘어 골을 기록했음에도 대한민국의 질주는 멈출 줄을 몰랐다. 상대 선수들이 점차 체력적 한계를 드러낼 때도 계속 찬스를 만들었다. 이금민의 크로스가 상대 수비를 전부 제치고 조소현의 발에 들어가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이 장면이 골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콜린 벨 감독이 압도적이지 않되 꾸준한 팀을 만들었다'는 건 충분히 증명할 수 있는 한 순간이었다. 이후에도 큰 위기상황 없이 경기는 끝났고, 상암의 대한민국 홈 팬들이 환호했다. 위험한 상황을 계속해서 맞던 전반을 지나, 대등하게 붙으며 한 골 한 골을 만들어 서서히 장악해가던 후반을 거쳐 상대에게 지속적 위협을 준 막판까지. 대한민국은 계속해서 나아졌다. '고강도' 플랜이 우리에게 준 것, 버티는 힘을 실전으로 실감한 경기였다.

 

 

경기 후 : 주인공이자 즐기는 자, 그날의 선수단

 

 평생 동안 봤던 다른 경기들은 모두 경기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해야 했지만, 이날은 출정식이 있었다. 

 

https://youtu.be/_jdniQ3fp5U

 

 과거부터 미래까지, 한국 여자축구의 많은 순간을 단 4분으로 보여준 감각적인 영상이 전광판을 통과했다. 이후 경기를 승리로 마친 선수들이 한 명 한 명 호명되며 모두 다시 선수단 입장 터널을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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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를 볼 땐 중계화면 기준으로 오른쪽 필드를 거의 지켜보기 힘들게 만들었던 구조물이 출정식이 되니 선수 한 명 한 명을 화려하게 등장시키는 문이 되었다. 선수들은 대체로 떨기보다는 필드로 나오는 순간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첫 번째 대표 발탁에서 큰 행사를 맞은 케이시 페어 유진은 긴장한 듯 별다른 세레머니를 하지 못했지만, 다른 선수들은 덤블링과 옆돌기 등으로 분위기를 띄웠다. 이금민은 옆돌기 도중 문화체육관광부 박보균 장관 쪽으로 틀어져 중계진을 포함한 경기장의 모두를 놀래키기도 했다. 자주 웃었지만, 문이 열릴 때마다 뭉클했다. 이렇게 화려한 무대를 많이 겪기는 어려웠을 선수들이다. 선수 한 명 한 명이 가장 많이 즐거워하고 오래 기억했으면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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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정식 행사가 마무리된 후, 붉은악마 구역에 있던 대형 태극기가 필드에 등장했다. 선수들이 이를 들어올리고 한 바퀴를 도는 퍼포먼스였다. 4년 전과 8년 전의 월드컵 출정식은 실내에서 기자회견 형식으로 진행됐다. 나라를 대표해 가장 큰 경쟁에 합류하는 건데, 남들처럼 이런 모습을 진작부터 보여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2015년 월드컵부터 소집됐던 베테랑 선수나 이번에 처음 월드컵을 밟는 신예 선수나 이런 경험을 한 번 한 건 같다는 게 마음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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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마음도 잠시, 출정식 공식행사가 마무리되자 AOMG 크루의 공연이 시작됐다. 선수들이 아티스트와 자유롭게 어울리고 춤을 추는 장면이 정말 인상적이었고 웃음이 나기도 했다. 힘들었던 평소 리그에서의 하루하루도, 국가대표로 소집돼 식욕이 없어질 정도로 강한 훈련을 받던 대표팀에서의 하루하루도 그때는 느껴지지 않았다. 신이 나 있는,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모습만 남았다. 지소연은 자신에게 인간화환을 걸었고, 이금민은 막춤으로 팬들까지 웃겼다. 경기 중 가벼운 부상을 당해 공연이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아이스박스에 앉아 있던 조소현은 사이먼 도미닉이 울려퍼지자 아예 한 발로 콩콩 뛰며 센터서클로 갔다. 평생 동안 본 '깽깽이' 중에서 가장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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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선수들이 물론 경기할 때는 정말 프로페셔널하지만, 방금 인터뷰(장슬기 : 소연 언니가 패스를 너무 세게 줘서 당황했다)에서도 볼 수 있듯이 끝나면 소녀가 되잖아요?" - 강성주 해설위원

 

 즐길 수 있는 시간에 전부의 마음으로 즐기는 선수들이, 평소의 힘듦을 그 한 번의 계기로 다 떨칠 수 있는 선수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자격있는 선수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돌아가길

 

 대한민국 여자대표팀은 이날 큰 수확을 거뒀다. 월드컵 첫 상대인 콜롬비아에 대한 대비책을 비슷하게 중앙아메리카에 위치하고 스피드가 돋보이는 아이티를 상대로 경험해본 것도, 홈 팬들 앞에서 멋있는 역전승을 거둔 것도 수확이지만 가장 큰 결실은 대표팀이 '기회를 받을 자격'을 증명했다는 것이다.

 

 여자대표팀에 주어지는 기회는 그렇게 많지 않다. 월드컵 출정식이 실내 행사장에서 진행된 적도 많고, 국제대회를 위해선 준비하는 국제경기가 필요한 법인데 A매치 개최도 많이 하지 못했던 과거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조금 더 크게 보면 여자 축구선수들에게 주어지는 기회 자체가 희박하다. 최상위 리그에서도 관리가 잘 되지 않은 인조잔디 구장을 쓰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장슬기와 최유리는 이날 경기 전 전광판으로 송출됐던 KFA 인조잔디 인증제도 안내 영상에서 "안 좋은 인조잔디는 딱딱해서 카페트를 밟는 것 같다", "비가 오면 한쪽에 물이 고여있다"는 힘든 점을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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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 이야기가 유소년의 문제에만 국한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WK리그 서울시청 홈경기에 갔다가 공이 튈 때마다 흙먼지가 날리는 구장의 상황을 접했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리그에서조차 브러싱도 안 된 인조잔디에서 경기하는 무대에 유소년이 유입되고 실력이 나아지길 원하기는 힘들다. 

 

 아이티전에서는 9,127명이라는 많은 관중들이 입장해 좋은 경기를 보고 출정식 행사를 함께 즐겼지만, 대부분의 WK리그 경기에는 300명도 안 되는 팬들이 서해의 섬처럼 각자 떨어진 채 경기를 지켜본다. 주말 경기는 플레이오프를 제외하면 있지도 않고, 서포터즈의 리더조차 모든 경기에서 퇴근 후 여유 없는 퇴근시간에 쫓기며 지각할 위기를 맞는다. 참고로 아래 나오는 사진의 수원FC위민은 K리그 구단, 즉 프로팀 프런트가 경기 업무를 전담하고 WK리그 구단 중 유일하게 유료입장을 시행하며 구장 또한 K리그 팀이 쓰는 천연잔디와 동일한, 리그 구단 중 가장 사정이 나은 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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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든 종목의 모든 대표팀에게 좋은 성적과 승리를 기대하고,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은 그게 안 나오는 모든 대표팀을 비난한다. 그러나 평소의 관심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성과도 뿌리도 지속가능성도 기대하기 어렵다. 

 

 출정식 날의 대표팀 선수들은 좋은 잔디에서 부상 위험이 최소화된 상태로 뛸 기회를 얻었다. 많은 관중 앞에서 환호를 받으며 좋은 경기를 보여줄 기회도 얻었다. 그러나 이 기회는 그 선수들에게조차 정말 적은 기회였다. 기회가 늘어야 뛸 맛이 나고, 뛸 맛이 나야 사람이 들어오며 사람이 들어올 때 퇴보의 위험이 줄어든다. 상암에서의 많은 관중들과 어느 때보다 뜨거운 분위기를 느끼며, 여자축구에 이런 날이 더 자주 찾아올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을지를 떠올려봤다. 서울에 여자축구부가 있는 초등학교는 출정식 오프닝 영상에 나온 우이초등학교 하나뿐이다.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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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든 종목을 하면 최고가 돼도 자신만을 고민할 수도, 팀만을 고민할 수도 없다. 최근에 읽었던 지소연 인터뷰집에서는 인프라를 고민해야 하는, 그를 개선하기 위해 말하는 방식까지도 고민해야 하는 종목 최고 스타라는 아이러니하면서도 마음아픈 캐릭터를 접했다. 축구팬들도 아이티전 같은 순간이 늘어나면 좋겠다는 마음은 같을 것이다. 어떤 모습이든, 어떤 결과를 내든 태극기를 달고 뛰는 선수들이 나쁜 환경에서 관심을 받지 못하고 뛰길 바라는 한국인은 없을 테니까.

 

2023 호주-뉴질랜드 FIFA 여자 월드컵 H조

대한민국 : 콜롬비아 7.25 11:00

대한민국 : 모로코 7.30 13:30

대한민국 : 독일 8.3 19:00

 

 이번 호주-뉴질랜드 여자월드컵의 대한민국 대표팀 일정이다. 새벽보다는 시간대가 낫다. 물론 많은 분들이 함께해주시면 좋겠다. 좁은 공간에서 섬세한 결정으로 풀어나가는 플레이, 그 어떤 다른 종목이나 성별의 선수에 뒤질 것이 없는 이기고픈 마음. 그런 것들을 월드컵으로 경험하는 시청자가 늘어났으면 한다.

 

WK리그 19라운드 - 8.22 19:00

수원FC위민 : 서울시청 @수원종합운동장

창녕WFC : 문경상무 @창녕스포츠파크

인천현대제철 : 세종스포츠토토 @남동아시아드럭비경기장

화천KSPO : 경주한수원 @화천생활체육공원 주경기장

 

 그리고 누군가는 그 월드컵에서 느낀 재미를 이곳으로 옮겨왔으면 한다. WK리그 재개 첫 라운드 일정표다. 

 

 여자축구대표팀은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성대한 출정식을 치렀지만, 여자 축구선수들의 현실은 그 옆 상암 보조경기장에 가깝다. 구장의 사정도, 관중의 사정도 좋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아이티전 같은 날이 또 오는 건 요원해질 것이다. 대표팀은 상암에서 경기했지만 WK리그는 보조에서 한다. 역설적으로, 보조구장에 가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상암 주경기장에서 여자 대표팀이 경기를 치르는 일도 더 많아질 것이다. 사람이 늘어야 열악한 환경에 대한 담론이 생긴다. 말이 나와야 힘든 상황을 바꿀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바꿔갈 수 있는 정도의 사람들이 쌓인다면, 그 사람들을 믿고 여자축구에 뛰어드는 사람 또한 늘 수 있을 것이다. 모두의 생각이 어떤지는 모른다. 수준이 떨어진다는 해외축구 쪽 몇몇 사람들이 K리그에 하는 비판을 그대로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관심도 실력도 떨어지는데 무슨 임금 타령이냐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동일임금에 대한 주장은 축구의 시장성을 생각할 때 좀 말이 안 된다 생각하지만, 지소연도 5천만원을 받아야 하는 현실에도 문제가 있는 건 마찬가지라고 본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바랐던 무대에 사람이 오는 것을 즐거워하는 선수들을 보고, 나는 이런 날이 더 자주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 생각을 공유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도 같이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이렇게 끌고 왔다. 힘든 상황 다 이겨내고 하루의 큰 기쁨을 만끽하는 신데렐라도 물론 좋지만, 노력하는 선수들이 옆집처럼 많은 팬이 주는 기쁨을 더 자주 체감하는 것도 필요하다. 

 

 여자월드컵을 보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월드컵 이후 더 많은 사람들이 "이거 볼 만 한데?"를 느끼고, 대부분의 대표팀 선수들이 평소 뛰는 곳을 찾아줬으면 한다. 이번 월드컵이 선순환의 시작이 된다면 출정식 날의 행복은 우리 모두에게 더 자주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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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열혈축덕 2023.07.16. 15:36
진짜 거의 WK리그 초창기 시절부터 봐왔고 그로 인해 여자대표팀경기도 거의 현장에서 봤는데 이번 출정식은 그 어느때보다 준비 많이했고 노력많이했구나 라는게 느껴졌음 ㅋㅋㅋ 입장하는 순간부터 음악 신나는거 나오니까 나조차도 너무 신나더라고 ㅋㅋ
(저기 태극기 올라온거 밑에서 잡고 있는 내모습도 있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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