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프리뷰/리뷰 모든 사건과 역사는 '장소'가 있어 존재한다
- 최고의명장이강철
- 802
- 50
- 71
우리가 학교를 다닐 때, 특히 초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소위 학교괴담의 범주에 속하는 이야기가 시대를 가리지 않고 일정한 인기를 끌었고
그 이야기들에 놀라하고 무서워하곤 했다.
예를 들어, 늦은 밤에 혼자 남은 학교에서 화장실을 가서 대변을 누면 슬쩍 손이 하나 나와 빨간 휴지와 파란 휴지를 주는 귀신이 있다던가
운동장 앞에 놓여진 동상이 밤만 되면 살아 움직이는데, 특히 세종대왕 동상이 들고있는 책이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겨지면 무슨 일이 벌어진다던가...
하는 이야기들.
우리가 이러한 이야기들에 공감하고 재미있어했던 이유는 단 하나, "학교에 다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른이 되어 학교에 다니지 않게 되면 그러한 이야기를 그냥 어릴 때 들었던 괴담 정도로 여기며 무서워하지 않듯이, 특정 장소로부터 멀어지면 우리는 공감능력이 떨어지고, 감정이입 또한 제대로 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세대를 가리지 않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장소'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은 장소에 가장 신경쓴다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밤 늦게 화장실에 가면 귀신이 나타나 빨간 휴지와 파란 휴지를 준다"라고 했을 때 무서워할 사람은 별로 없을 테니까. 그만큼 장소는 우리의 감각을 구체화시켜주며, 그만큼 공감대를 넓혀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는 육하원칙에 기반하여 작성되는 신문 기사나 뉴스 보도에서도 유효하다.
예컨대 "OO시 기차역에서 소매치기 증가"이라는 기사가 떴다고 치자.
그러면 우리가 가장 먼저 보는 것은 소매치기도 증가도 아닌 'OO시'이다.
자기 동네에서 일어난 일이면 자기 지갑도 안전하지 않으니 두려워하고, 자기 동네가 아니라면 안심하면서도 그 동네 사람들을 걱정한다.
이처럼 우리에게 가장 큰 소속감을 안겨주는 것은 언제나 '장소'이다. 우리는 장소 위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과 같은 장소에 있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기 쉽고, 그만큼 공감하기도 쉽다.
한국인이라고 하는 5000만명을 묶을 수 있는 가장 큰 정체성도, 우리가 '한국'이라는 장소에 살고 있다는 전제가 붙어있어 모두를 묶을 수 있는 것처럼.
이제 축구 얘기로 넘어가보자.
축구라는 종목, 축구 경기에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은 당연히 11명의 선수이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경기장이다.
경기장이 있어야 경기를 볼 사람이 모이고, 축구경기를 할 수 있다.
그리고 꾸준히 경기를 하고 꾸준히 경기장에 올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는 한 곳에서 경기를 해야 하고, 이것이 바로 홈 구장의 시작이다.
더 나아가서 프로축구라는 개념의 시작이 "안 돌아다니고 계속 장사하는 축구팀"이 있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묘기를 보여주는 서커스 유랑단이 아닌, 평범한 공놀이라 할지라도 특정 지역에 머무르며 정착해 지역민들에게 공감대를 안겨주니 말이다.
그렇기때문에 자신들의 홈구장을, 연고지를 버린 팀을 미워하는 것과
자신들의 팀을 되찾고, 옛 경기장을 다시 지어 새로운 추억과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팀에 로망을 가지게 되는 것 또한 당연히 보편적인 축구팬의 정서가 된다.
예컨대 대부분의 축구팬에게 MK돈스와 AFC 윔블던 중에 어느 팀이 더 호감이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연고지를 버린 팀에 대항해 새로 팀을 만들어 되찾고, 옛 경기장을 팬들의 힘으로 새로 지은 윔블던을 택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모두의 애정 속에서 자라나는 홈구장에 대한 공감대, 팀에 대한 공감대에서 시작되는 엄청난 응원 열기는 선수들에게 큰 힘을 안겨주고
이는 다른 구장보다 더 높은 홈구장 승률을 통해서 보여준다.
그리고 홈구장의 승률이 높으면 높을수록 순위가 높아지고, 순위가 높아질수록 더 많은 연고지 팬이 유입되어 응원열기는 더더욱 뜨거워지고, 이 과정이 십 년 이십 년이 넘어가면 구단의 문화가 되어 세대를 거쳐 응원문화와 열기가 계승된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아르헨티나 대표팀과 리버 플레이트의 홈 구장인 엘 모누멘탈이다.
지붕 없이 탁 트인 구장에서 7만명이 넘는 관중이 던져대는 휴지폭탄, 상대팀에 대한 귀가 찢어질듯한 야유, 우리 팀 선수를 향한 열광적인 응원은 단순히 축구장을 넘어 일종의 광기어린 예배장과 같은 느낌을 주어 상대 선수를 움추리게 만들고, 우리 선수에게는 어깨가 펴지도록 한다.
이런 경기장에서는 상대 팀이 누가 온다고 할지라도 승리를 보장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 경기장을 홈으로 쓰는 팀들은 경기장의 이점을 활용해 최강의 팀으로 자리매김하고, 최강의 팀이 되면 응원열기는 더더욱 거세져 마치 무한동력처럼 그 어떤 손실도 없이 선순환으로 이어진다.
이 선순환은 꼭 수준 높은 축구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수준이 높지 않은 축구에서도 유효하다.
예컨데 이란이 아시아에서는 축구 강국일지 몰라도 세계적으로는 축구 강국이 아니지만, 이란의 아자디 스타디움에 들어서는 모든 원정팀들은 고산지대 적응 문제와 함께 아자디만의 열광적인 분위기로 인해 기가 꺾인 채 경기를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이란 대표팀은 자신들의 홈 그라운드에서는 최소한 경기에 지지는 않는다. 예컨대 아시아에서 똑같이 강팀으로 뽑히는 한국과 일본 대표팀도 이란 원정만큼은 비기기만 해도 된다고 할 정도니까.
그리고 한국에서, K리그에서 가장 엘 모누멘탈과 아자디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경기장이 있다면 바로 수원 삼성의 홈구장인 빅버드일 것이다.
N석 1층을 가득 채운 푸른 물결과 다른 팀과는 비교조차 실례일 정도로 우렁찬 응원소리, 빙글빙글 돌아가는 청백적 우산과 파라솔은 상대팀 선수 뿐만 아니라 S석에 자리잡은 원정 응원단에게도 엄청난 위압감을 안겨준다. 저렇게 열광적인 홈 팬과 마주보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 원정팬은 전의를 조금씩 잃어가고, 선수들 또한 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나 강한 정체성과 공감대를 바탕으로 수원 삼성은 빅버드에서 리그와 FA컵, 리그컵을 포함해 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정식 명칭은 수원 월드컵 경기장이지만 애칭은 빅버드이라 팀 이름인 '블루윙즈'와 참 잘어울리는, 누가 봐도 수원 삼성스러운 경기장.
수원 삼성을 싫어하는 사람이래도 빅버드는 수원 삼성에게 가장 잘 어울리고, 그 팀만이 소화해낼 수 있는 경기장이라는 점엔 모두가 공감하리라.
반대로 수원 FC가 홈구장으로 쓰는 수원종합운동장, 캐슬파크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지붕은 본부석에만 작게 있고, 무려 1970년에 지어진 낡은 경기장. 종합운동장이라 시야도 상대적으로 좋지 않으며 응원 열기도 낮아 경기장은 조용하다.
수원 삼성의 홈 구장인 빅버드와 비교를 하면 당연히 비참해보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수원 FC가 캐슬파크에서 만든 역사가 아무것도 없냐고 하면 그것은 아니다.
2015년의 감격스러운 첫 승격, 2016년 첫 강등의 치욕, 2020년 추가시간 PK를 통해 따낸 재승격의 기쁨, 승격 이후 첫 상위 스플릿과 이승우의 데뷔골, 박주호의 은퇴식 등등
나름대로 많은 사건을 쌓아올렸고 구단의 역사를 만들어냈다.
이 과정을 거치며 알게모르게 팬덤을 불려나가 2023년 기준으로는 리그 3위라는 호성적을 내고 돌풍의 팀이 된 광주보다도 많은 관중이 경기장에 찾아오지 않았던가.
그리고 수원 FC하면 캐슬파크라고 모두가 인식하지 않았던가.
갑자기, 빅버드를 가자고 한다.
첫 승격 이전부터 수원 FC 경기를 본 오래된 팬들이라면 빅버드에 대해서는 "잔디 공사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써야했던 그 넓고 황량하기 짝이없던 1년"이었을 것이고
승격 이후에 유입된 팬들에게는 그저 "수원더비 원정가서 이긴 기억" 외에는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어쨌거나 저 둘의 공통점이라 한다면
"빅버드가 우리 홈 구장은 아니지"라고 하는 정서와 공감대.
그런데 구단에서는 한 시즌을 풀로 썼던 2014년에는 리그 6위라는 보잘 것 없는 성적만을 남겨 그 어떤 역사와 사건도 남기지 못한 이 곳을 홈구장으로 쓰자고 한다.
뭐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빅버드에 붙는 광고와 광고수입이 부러웠을지도 모르고, 빅버드만의 열기가 부러웠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정말 단순하게 그럴듯한 경기장이 부러웠거나.
하지만 저기서 경기장을 뺀 모든 것은 경기장을 옮긴다고 해도 결코 수원 FC가 나눠받을 수는 없다.
저 모든 것은 결국 수원 삼성이 '빅버드'라는 경기장을 씀으로써, 구단과 팬이 공감대와 정체성을 가지고 만들어낸 역사 그 자체니까.
반대로 수원 FC는 정체성과 공감대를 전부 캐슬파크에 적을 두고 있는데, 빅버드의 그 무엇도 얻어내지 못할 것이면 과연 남는 것이 뭐가 있을까?
아마 얻을 것이라고는 노근본의 족쇄 뿐일텐데 말이다.
이 모든 게 단장 혼자의 독단일리는 없다. 구단 내에서도 빅버드로 옮기자는 의견이 대다수였을 것이고, 그 이전부터 구단에 입김을 불어넣는 지역 축구계와 시에서도 종합같은 낡은 구장 유지하기도 돈이니 빅버드로 옮기자는 말을 해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구단의 정체성을 지키고, 더욱 더 발전시킬 의무가 있는 단장이 추진해도 되는 일일까.
일부 팬들에게도 묻고싶다.
적당한 숙의과정을 거친다고 해도, 그동안 캐슬파크에서 쌓아올린 구단의 정체성과 공감대를 쉽게 져버려도 되는 것일까?
그렇게 버리면 우리가 정말 수원 삼성과 같은 인기구단이자 명문구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런 무책임한 술수에 왜 캐슬파크에서 쌓아올린 구단의 정체성에 공감하고 이를 지키려고 하는 팬이 괜히 상처입는 상황이 반복되어야 하는걸까.
남의 팀의 사악한 음모로 인하여 왜 에꿎은 수원 삼성의 팬이 괜히 얼굴을 붉혀야만 하는 것일까.
앞에서 한 얘기와 축구 얘기를 조합해보자. 그러면 결론은 한 문장으로 요약이 가능하다
"모든 사건은 '장소'가 있어 존재할 수 있으며, 역사는 사건의 집합이니만큼 역사 또한 '장소'가 있어 존재한다"
캐슬파크라고 하는 영광과 오욕의 장소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는 지금, 우리의 캐슬파크는 수치의 장소로 덧씌워지고 있다.
역사를 쌓아올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나, 무너트리는 건 작은 손짓 하나면 충분한가보다.
댓글 50
이 말 진짜 멋있네.
언제까지 '유일한 개축 무경험 승격팀' 타이틀 하나만으로 딸딸이 칠건데,,, 그 이외 본인들만의 스토리와 매력, 캐릭터성으로 쇼부를 봐야지 왜 자진해서 빅클럽들 카게무샤로 들어가려 하는건지 참
정성글 개추
이거 진짜 띵언
그리고 앞으로 더 내놔라 좋게 말할 때!
굿!
수원삼성이 지금 이렇게 쳐박혔는데도 불구하고 평관 1만과 대규모의 팬덤이 유지되는 비결이 그저 월드컵경기장을 사용하기 때문인 것이라 착각을 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작년 초에 언급한대로 확정도 안났으면서 월드컵 경기장을 쓰니까 스폰달라는 식의 영업을 또 하고 다닌 건 아닌지
참 여러모로 이해하기 힘들다
이 말 진짜 멋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