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프리뷰/리뷰 Das spiel ist aus, 유희는 끝났다.
- 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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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련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모래바람이 서글거리는 운동장에 학생들을 줄 세운 뒤 수업 시간 내내 제식훈련 같은 똥군기를 가르치는 끔찍한 과목이었다. 분명 시대가 바뀜에 따라 텐트치는 법이나 구급법 같은 내용-물론 이것도 끔찍하긴 마찬가지 였다-으로 교과서가 채워졌지만, 교련 선생은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매시간 학생들을 줄 세우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런 개똥같은 과목 중에서도 내게 가장 개똥같은 시간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낙법 시간 이었다. 교과서 어디를 찾아봐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던 낙법 시간은, 유도 선수 출신의 교련 선생이 만들어낸 자신만의 시그니처였다. 방법은 간단했다. 의지가 충만한 교련 선생의 ‘전방낙법!’, ‘후방낙법!’ 구령에 맞추어 매트 위에 몸을 던지면 되는 일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구도 낙법에 관해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 그저 알아서 몸을 던지고 다치지 않는 법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
교련 선생은 매번 자신이 그 말도 안 되는 낙법 훈련을 시키는 이유에 관해 ‘잘 넘어지는 법을 알아야 상대를 넘어뜨릴 수 있다’고 둘러댔지만, 그의 말 중 어느 한 구석도 와 닿는 부분이 없었다. 다만 시간이 흐른 뒤 깨달은 것은 있다. 그 지옥 같은 낙법 시간이 그랬듯, 인생 역시 아프지 않게 떨어지는 법을 알려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그리고 잘 넘어지는 법을 알면, 상대를 넘어뜨릴 수는 없을지언정 최소한 몸과 마음을 다치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이 그 개똥같았던 시간의 성과라면 성과랄까.
추락, 꼬리에 꼬리를 물고
2018 러시아 월드컵 명단이 발표된 직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던 몇몇 선수들 중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단연 이청용이었다. 물론 지금은 팬들의 사랑보다는 의문 가득한 시선이 익숙한 선수가 되어버렸지만, 그의 커리어를 내리막 길로 몰아넣은 그 부상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전 국민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선수였다. 비록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은 적었지만, 나 역시 그를 사랑했다. 선한 얼굴을 하고 아기자기한 플레이를 하는 와중에 순간적으로 보이는 상암동 미친개의 그 거친 발길질. 나는 그의 그런 야누스적인 면모를 사랑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상암동 보조경기장에서였다. 시간이나 죽일까 찾아간 그곳에서 나는 한 마리 학처럼 고고하게 공을 차는 그를 보았다. 그라운드 위에는 기성용, 고명진, 고요한, 한동원 같은 재능들이 즐비했지만, 어느 누구보다도 그의 날개가 커보였다. 그가 예상보다 훨씬 더 높은 곳까지 훨훨 날아 올라갈 것은 당연한 듯 보였다.
그리고 몇 년 후, 그는 생각보다 빨리 날갯짓을 시작했다. K리그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보였고, 이후 볼튼으로 이적하며 7번째 한국인 프리미어리거이자 최연소 한국인 프리미어리거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모든 이들이 밤을 새며 그의 경기를 지켜보았고, 반년 만에 팀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그는 보다 높은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만큼 빨리 그리고 더 높이 올라갔었던 것처럼, 그의 추락도 빠르고 격렬했다. 날개를 얻어서 미노스의 미궁을 탈출할 수 있었지만, 아름다운 태양을 좆다 결국 날개가 망가져 추락해 죽고 마는 이카로스처럼, 그의 날개는 순식간에 꺾였다.
비극의 시작은 부상이었다. 정강이뼈가 완전히 두동강 날 정도로 끔찍했던 부상은 찬란했던 그의 축구 인생에 그늘을 드리웠다. 그리고 7년 동안 이어진 어둠. 누군가는 소극적 행보가 아쉽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욕심이 과하다고 했다. 그가 새로운 시즌을 맞을 때마다, 대표팀 명단이 발표될 때마다 그의 이름 뒤에는 7년 내내 스스로 떼어내지 못한 물음표가 따라다녔다.
그리고 어제, 나는 몇 년 만에 그의 플레이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티브이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7년 동안의 어둠을 그가 스스로 깨고 나올 수 있기만을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휘슬이 울리고 그가 피치 위에 두 번째 넘어졌을 때쯤 생각했다. 그는 지난 7년 동안 소극적 행보를 한 것도, 또 개인적 욕심 때문에 벤치만 달구고 있었던 것도 아닐지 모른다고. 그저 그는 어떻게 떨어져야하는지 몰라 그 자리에서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던 것 일수도 있다고.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오스트리아 시인인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시에 등장하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라는 문장은, 이문열이 자신의 소설 제목으로 차용하면서 너무도 유명해졌다. 하지만 이 시의 제목이 ‘Das spiel ist aus’, 즉 ‘유희는 끝났다’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물론 고상하게 앉아서 시 얘기나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 두 문장,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와 ‘유희는 끝났다’의 사이 어디쯤엔가, 최소한 몸과 마음을 다치지 않고 떨어지는 법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건네려는 거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추락은 날개가 있는 이들만 할 수 있다. 처음부터 날개가 없다면, 추락또한 할 수 없다. 추락하는 모든 것은 날개가 있다. 날개가 없다면 나는 것은 꿈도 못꾸고 기껏해야 달리거나 걷는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추락은 희망이다. 추락은 날개가 있다는 증거이고 다시 비상할 수 있다는 희망이다.
하지만 다시 비상하기 위해서는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다. 유희가 끝났음을 인정하는 것. 억지로 버티고 있던 균형의 힘을 풀고 떨어지는 것. 떨어지는 것이 두려워 위태롭게 버티고 서있다 해도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버티는 것 뿐임을 인정하는 것. 땅에 발을 디뎌야만 비로소 다시 박차고 올라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거기서 버티고 있는 그대여. 유희는 끝났다. 이제 그만 떨어져라. 눈을 질끈 감고 위태롭게 잡고 있는 손을 놓아버리면 그만이다. 손을 놓아야 할 때 놓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인생 최고의 낙법이다. 분명 아플거다. 세상에 아프지 않은 추락은 없다. 하지만 너무 두려워하지도 말자. 당신이 떨어지는 그 자리에 나와 같은 사람들이 당신의 아픔을 함께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이다.
청용아, 유희는 끝났다. 돌아와라. 그리고 다시 함께 날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