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프리뷰/리뷰 이 폐허를 응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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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리베카 솔닛의 책 <이 폐허를 응시하라(A Paradise built in Hell)>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습니다.

 

 

 

 

어제는 출근하는 내내 월드컵을 둘러싼 들에 대해 생각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아침, 내가 또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려대며 버럭 화를 내고 말았기 때문이다. 매번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벌어지는 일이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현재 공사 중인 도로 하나를 두고 주민들 사이에 암묵적인 룰 같은 것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사거리를 건너기 전, 미리미리 양쪽 두 차선을 비우고 신호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 왕복 8차선 사거리의 들머리에서 차로를 4개나 잡아먹고 진행되는 지하철 연결공사 때문에 벌어지는 병목현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주민들 스스로 체득한 지혜다. 하지만 주민들의 그런 일사불란한 움직임에도 아침 출근길이 항상 물 흐르듯 행복하게 이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의 암묵적 질서에 파열음을 내는 그들이 매번 등장하기 때문이다.

 

신호가 바뀌면 재난이 시작된다. 질서를 유지하려는 쪽과 질서를 파괴하려는 쪽의 싸움이 아슬아슬하게 교차한다. 두 줄로 정차해있던 차들은 서로서로 꼬리를 물고 서서 그들의 침입을 방어한다. 그에 맞서 그들은 하나같이 비상 깜빡이를 켠 채 호시탐탐 연대의 균열을 파고든다. 빵빵빵 울려대는 경적과 짧은 뒤엉킴 그리고 서로를 향한 아우성 뒤에 승자가 결정되면, 차들은 흩어지고 도로는 또 다음 재난을 준비하며 잠시 침묵에 빠진다.

 

어제 아침도 그랬다. 비까지 오는 통에 평소보다 차들도 많았다. 아니나 다를까,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검은색 세단 한 대가 나와 내 앞차 사이의 틈을 위협적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내 뒤를 따르는 차들에게 패배자의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조금 더 앞차와의 간격을 좁혔다. 그러자 상대는 질 수 없다는 듯 더욱 공격적으로 차를 몰았다.

 

! !’

 

결국 내가 먼저 경적을 눌러버렸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자 짙게 선팅된 창문 너머로 상대의 손가락질과 날카롭게 움직이는 입술이 보였다. 그리고 이어진 눈싸움. 우리는 창문 두 개를 사이에 두고 짧은 욕설을 주고받았다. 평소라면 그 정도로 끝났을 일이지만 이번엔 상대의 창문이 내려왔다.

 

“XX놈아! 너 운전 그따위로 할래?”

 

이번엔 내 차례였다. 욕 한 바가지로 받아쳐 줄 심산이었다. 나도 창문을 내렸고 야수와 같은 심정으로 버럭 하고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불현듯 멋쩍음이 밀려왔다. 창문을 열고 생판 처음 보는 상대와 얼굴을 마주하자 내 마음속 야수가 사라졌다.

 

아저씨, 욕하지 마세요. 뒤에 차들 안 보이세요? 이렇게 갑자기 끼어들면 차가 밀리잖아요. 원래 여기는 두 줄로 서야 합니다.”

 

내 말에 상대도 멋쩍은 듯 말했다.

 

아니, 표지판도 없는데 제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제가 법규를 위반했습니까? 뭘 했습니까? 양보 좀 해주시면 좀 좋습니까?”

 

나는 귀찮은 듯 손사래를 치며 마지막 한마디를 던지고는 창문을 닫아버렸다.

 

, 그냥 빨리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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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성이 걷히면 보이는 것들

기분이 이상했다. 욕을 욕으로 받아치지 못한 게 솔직히 분했다. 그런데 상대와 나의 얼굴을 가려주던 자동차라는 익명의 공간이 창문과 함께 사라지자, 이름 석 자도 모르는 상대에게 성질대로 버럭 욕을 퍼붓는다는 것이 조금 멋쩍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실 상대도 나도, 아침 출근길에 서로에게 저주의 말을 들을 만큼, 그 상황에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그 책임은 6개월째 지지부진하게 공사를 이어가고 있는 시 당국이나 매일같이 벌어지는 출근길 교통재난을 방치한 채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경찰 당국에게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상대와 나는 자동차 안에 틀어박혀 서로의 무지와 예의 없음에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운 채 화를 내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우습고도 잔인한 일이었는가?

 

그래서 든 생각이다. 이번 월드컵 내내 우리가 익명성이라는 인터넷의 장막 뒤에서 서로에게 쏘아댔던 말들에 관해서 말이다. 우리가 쏟아낸 무책임한 말들의 일부는 비수가 되어 한 선수의 아내가 소중하게 쌓아왔던 추억들을 삭제하게 만들거나, 아직 경기를 남겨둔 선수를 기자들 앞에 서지도 못할 만큼 위축되게 만들었다. 또 그 일부는 서로에게 날아가 이상한 방향으로 재생산되며 알 수 없는 증오와 반목만 키웠다.

 

슬라이딩만 해서 한국까지 와라”, “국가대표 반납해라에서 시작된 분노는 이래서 케이리그는 거른다. 케이리그 폐지!”, “TV로 해축만 보는 XX들이 뭘 안다고 떠드냐?”에서 증오로 바뀌더니, “4년마다 한 번씩 축구 보는 사람들은 닥쳐라”, “오타쿠 새끼들이 재미도 없는 개축 좀 빤다고 선민의식 쩔어요를 거쳐 락싸 XX들은.... 펨코 XX들은.... 펨네 XX들은.... !!! 이래서 안돼!”에서 서로를 겨눈다. 그리고 그 말들의 향연은 결국 축알못!”이란 한 마디를 남긴 채 끝난다.

 

그런데 말이다 우리가 지난 몇 일동안 서로에게 쏘아댔던 말 만큼이나 그 말이 가 닿았던 상대가 지금 벌어진 상황에 대해서 진짜책임이 있는지는 한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그리고 지금 이 문제가 인터넷이라는 익명의 장막을 걷어냈을 때에도 역시 서로가 서로에게 그토록 모질게 굴어야 하는 문제인지도 함께 생각해봐야 한다. 마치 어제 아침 내가 길에서 마주했던 상황처럼, 진짜 문제를 뒤로한 채 우리는 그저 서로의 예의 없음과 무지만을 탓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4년마다 반복되는 재난의 축제

폐허다. 4년마다 한 번씩 몰아치는 월드컵이라는 재난은 또 다시 한국 축구를 폐허로 만들었다. 매번 같은 패턴이다. 그것은 성적과도 상관이 없다. 결과가 좋았을 때에는 좋은 대로, 또 나빴을 때에는 나쁜 대로 비이성이라는 태풍이 몰아친다.

 

그렇다고 월드컵 자체가 좋으냐 나쁘냐를 따지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월드컵을 둘러싼 국가주의, 자본, 인권, 소외와 같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축제는 이성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다. 탈일상적이어서 축제고, 비이성적이어서 축제다. 축제의 기능이 한시적 일탈을 허용해 지배체제의 지속 가능성에 복무하는 것이라고 보는 시각에는 동의하지만, 모든 사람들을 금욕주의자로 만들 요량이 아니라면 월드컵의 존재 자체는 지켜봐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 비이성이 문제해결 자체를 가로막아 버린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한국 축구는 4년마다 한 번씩 허물어졌다가 다시 세워지고, 허물어졌다가 다시 세워지기를 반복했다. 순서는 이렇다. 월드컵이 끝나면 사람들은 희생양으로 삼을만한 선수에게 집중포화를 날려댈 것이고(그건 월드컵이 진행되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성적에 책임을 지고 감독이 물러난 뒤엔 또다시 인물을 놓고 싸울 것이다. 그다음은 또 감독의 전술을 놓고 일희일비 할 것이고, 어느새 4년이 흘러 우리는 월드컵 출전 명단에 대해 갑론을박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과 같은 성난 말의 향연이 자리를 채울 테고 말이다.

 

그런 지난한 과정을 겪는 사이, 4년 뒤 허물어질 한국 축구라는 가건물은 또다시 얼기설기 엮어진다. 어차피 허물어질 건물이라 대충 엮어놓아도 그만이다. 이 과정에는 어떠한 장애물도 없다. 중간 중간 어설픈 속살이 드러나겠지만, 어차피 시간은 축제를 향해 흐를 것이고, 비난의 시선은 사람을 향할 것이다. 무엇이 문제겠는가?

 

 

 

폐허.jpg

 

 

 

응시하라, 그리고 인정하라

해결책은 명확하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알고, 나 같은 축알못도 아는 그것, 바로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지금 무너져내리고 있는 이 폐허의 공간을 가만히 응시하는 것. 기둥 하나라도 건져볼 심산으로 섣부른 제언이나 날 선 비판을 건네는 것이 아닌, 이성의 잣대로 그저 바라보는 것이다. 월드컵 참패라는 성적을 받아 안은 시스템이 무엇으로 또 어떻게 회복되어 가는지,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조직적, 행정적, 도덕적 결함이 무엇인지 먼저 가만히 바라보자는 이야기다.

 

우리가 지난 4년간 그래왔던 것처럼, 폐허 속 높이 세워진 장대에 달아놓을 희생양 찾기에 몰두한다면, 교체되어야 할 시스템이 또다시 폐허 위에 가건물을 세우기 시작할지도 모를 일이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가 명확함에도, 감정을 앞세워 누가 잘못했는지만 따지는 것은 실제로 무의미하다. 분명한 것은 감정 혹은 비이성은 문제를 드러내 줄 수는 있겠지만,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문제 해결의 출발점을 그저 한국 축구의 속살을 똑바로 응시하는 것에 두는 일은 분명히 큰 의미가 있다.

 

아니, 그 전에 또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신도 나도 해결책을 알고 있다는 것인정하는 것이다. 4년에 한 번 축구를 보는 팬이건, 케이리그를 보는 팬이건, 해외 축구를 보는 팬이건, 각론에서는 작은 차이를 보일지 몰라도 사실 우리는 모두 그 해결책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 작은 각론의 차이, 성격적 차이를 가지고 서로를 예의 없고 무지한 존재로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재난으로 무너져버린 폐허 위에서 서로 살아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서로를 향한 비난과 분노가 아니라 인간적 이해연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책 <축구, 그 빛과 그림자>에는 다음과 같은 헌사가 적혀있다.

 

이 글을 수년 전 칼레야 데 라 코스타에서 나와 마주쳤던 적이 있는 그 꼬마들에게 바친다. 그들은 축구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고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었다 : 우리는 이겼다, 우리는 졌다, 그러나 우리 모두 즐겁다.”

 

, 이제 몇 시간 후면 2018 러시아 월드컵 조별리그도 막을 내린다. 결과야 어찌될지 모를 일이지만, 나는 이 축제가 즐겁게 막을 내리길 빌어본다.

댓글 14

고정닉 작성자 2018.06.27. 21:22
 갓용수종신
인생의 진리입니다
댓글
고정닉 작성자 2018.06.27. 21:22
 세밀한혜리
손만 잡고 잘까??
댓글
아마 2018.06.27. 23:37
이저씨 문창과다니는 저보다 글 잘쓰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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