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프리뷰/리뷰 기분도 뭣같고해서 쓰는 옛날 축구 이야기
- 부산빠냥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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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74년 9월의 일.
당시 한일관계는 지금 한일관계 냉랭하고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안좋았어.
이유는 1974년 8월 15일 터졌던 문세광 저격미수사건으로 육영수 당시 대통령 영부인이 사망한지
불과 1달여밖에 안지난 상황이었기 때문.
당시 범인인 문세광 신분이 재일교포였고, 사건 수사 및 조문단 파견 관련해서 일본이 비협조로 나온데다
당시 일본 언론이 문세광 사건을 두고 '박정권 권력 유지를 위한 자작극 아님?' 류의 사설을 실어댄 탓에
한국 정부(정확히는 박통)이 빡쳤던 상황이었지.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고 정치깡패들이 서울 한복판에서 야쿠자들 마냥 손가락을 자르며
명성황후에 이어 육영수 여사까지 국모를 두번이나 죽인 일본에 복수하자고 시위까지 벌이는 판국이었어.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한일축구정기전이 열렸다는것.
분위기는 말안해도 알겠지? 무조건 한국이 이겨야하는 상황이었어.
근데 문제는.. 한일정기전 날짜가 1974년 9월 28일 / 74년 연고(고연)전 축구 경기 날짜가 9월 29일이었다는 점..
당연하다는듯(?) 당시 대표팀 주축이었던 차범근, 김호곤, 김희태, 황재만이 연고(고연)전 참여로 대표팀에서 빠졌어.
결국 차포 떼주고 한일정기전에 참가한 대표팀은 일본의 가마모토 쿠니시게에게 2골을 내주며 1:4 대패를 당하고 만다.
이게 내가 알기론 정식 A매치에서 벌어진 한일전 중 최다 실점패일거임.
당연히 한국대표팀에게 비난이 쏟아졌고, (거의 '어제오늘 중국이 인도랑 0:0 무승부하고 나오는 중국측 반응 x 10' 정도하면 될듯)
가뜩이나 한일정기전 직전에 벌어졌던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쿠웨이트에 0:4 대패(이건 북한 대표팀이랑 경기 피하려고 한국이 고의패배를 당했다는게 정설)를 당하며 분위기 개망이었던 대표팀은 한일정기전 1:4 대패까지 연거푸 얻어 맞으면서 한동안 침체기에 들어서고 만다. 이 때 대표팀서 퇴출된 선수도 꽤 되고 강제 리빌딩이 이뤄졌어.
결론은 연고(고연)전 >>>>>>>>>>>>>> 넘4벽 >>>>>>>>>>>> 박통 빡침 >>>>>>>>>>>>> 한일전 이겨야됨 이라는 것. 크흐 ;ㅅ; b
p.s : 이후로 한일정기전은 무조건 연고(고연)전 일정을 피해서 잡게 됨. 역대 한일전 A매치 경기기록 봐봐. 74년 이후로는 대부분 9월말에서 10월초는 피해서 잡혀있음
p.s 2 : 한일정기전에 앞서서 같은 날 오픈게임 형식으로 한일대학축구정기전은 고대/연대 선수들 다 빼고 나머지 한국 대학선수들로 선발구성해서 일본대학선발하고 붙었는데.. 요 경기는 4:1로 한국대학선발이 대승함. 이 때 해트트릭 성공한게 前 한양대 축구부 감독인 신현호 씨. 당시 일본에 지면 한국 돌아가서 돌맞을거라 생각하고 죽어라 뛰었다고.. 근데 오픈게임은 이겨놓고, 메인디쉬에서 상엎는 한국 클라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