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병자 문서 정리하다가 작년 3월 21일에 쓴 글을 봤는데, 다시보니 감회가 새롭다

<승점 3점 깎던 노인>

 

 

내가 개리그에 입문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 일이다. 서울 왔다 가는 길에, 상암에 가서 눈팅이나 할 생각이었다. 상암 경기장 맞은편 길가에 앉아서 ‘황새’라 쓰려있는 조그마한 입간판을 놓고 승점 3점을 깎아 파는 노인이 있었다. 마침 개축이나 즐겨볼 생각에 하나 깎아달라고 부탁을 했다.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좀 싸게 해 줄 수 없습니까?”

 

했더니

 

“승점 3점 하나 가지고 에누리하겠소? 비싸거든 TV로 해축이나 보시구랴.”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값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깎아나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깎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깎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리 돌려 보고 저리 돌려 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깎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타야 할 차 시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깎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내며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이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살 사람은 좋다는데 무얼 더 깎는다는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먼. 차시간이 없다니까요.”

 

노인은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서 사우. 난 안 팔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차 시간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깎아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승점이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깎다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깎던 것을 숫제 무릎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메모지에 야식메뉴를 적고 있지 않는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승점을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과정은 좋은데 공격 쪽을 더 다듬어야 한다며 시즌권을 사고 승점 1점만 먼저 가져가라고 한다. 승점 3점은 다음 주에 찾으러 오란다. 

 

차를 놓치고 다음 차로 가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장사를 해 가지고 장사가 될 턱이 없다. 손님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값만 되게 부른다. 상도덕(商道德)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능력한 노인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상암경기장 지붕 모서리를 바라보고 섰다. 그 때, 바라보고 섰는 옆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불쌍해 보였다. 피곤한 눈매에 웃음기를 잃어버린 모습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노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減殺)된 셈이다. 

 

집에 와서 그 얘기를 했더니 아내는 낚였다고 야단이다. 승점 3점을 언제 받을지도 모르면서 덜컥 시즌권만 구매 했냐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시민구단보다는 낫겠지 했다. 그런데 아내의 설명을 들어 보니, 심판 매수로 하부리그를 전전하던 경남도 올해 3연승으로 벌써 승점 9점을 쌓았고, 강원 역시 3연승으로 승승장구 중이란다. 나는 비로소 속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새삼스레 그 노인의 처사에 대해 화가 치밀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승점 3점은 혹 비기거나 지고 있더라도 반드시 극장골을 넣고 이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새 승점 3점은 그 모습을 보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예전에는 승점 3점을, 가능성 있는 선수를 발굴한 다음 전술에 잘 녹여 만들어냈었다. 물론 돈이 들었다. 그러나 요새는 FA 뿐이다. 돈이 될만한 선수는 전부 팔아버리고 부상을 입었거나 몸값이 싼 선수만 그러모았다. 돈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견고하지가 못하다. 

 

 

외국인 선수만 해도 그렇다. 옛날에는 공격수를 사면 클래스는 어떻고, 경력이나 공격포인트 어떻고 같은 것들로 구별했고, 개리그를 경험한 선수 같은 경우는 배 이상 비쌌다. 몰리나 같은 선수가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로지 가격 뿐이다. 오르샤보다 싸지만 우월한 재능을 가졌다던 마우링요는 브라질로 돌아갔고, 울산에서 방출된 코바는 주정뱅이가 되어 모습을 감추었다. 옛날 사람들은 가격은 가격이요 실력은 실력이지만, 외국인 선수를 사들이는 그 순간만은 오직 최고의 선수와 계약한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을 기울여 승점 3점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그 노인의 승점 3점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으리라 생각했던 내가 잘못이었다. 나는 그 노인에게 철저하게 낚인 것에 치욕감을 느꼈다. 피곤하고 웃음기 잃은 노인의 모습에 누그러졌던 마음은  "황새아웃" 이라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서 멱살잡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일요일에 상암에 가는 길로 그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노인은 있지 아니했다. 벌써 몸을 피한듯했다. 나는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나와 같이 그 노인에게 낚인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맞은편 상암경기장의 지붕 끝을 바라보았다. 푸른 창공에 날아갈 듯한 추녀 끝으로 참새 한 마리가 날고 있었다. 아, 그 때 그 노인이 저 참새를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승점 3점을 깎다가 유연히 지붕 끝에 참새를 바라보던 노인의 한심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무심히 "황새아웃, 황새아웃" 이라는 외침이 새어 나왔다. 

 

오늘 상암에 갔더니 경기를 하고 있었다. 전에 개랑, 매북을 쿵쿵 두들겨서 3점을 먹던 생각이 난다. 승점 3점 구경한 지도 참 오래다. 요새는 극장골도 볼 수 없다. 아데박이니 데몰리션이니 애수를 자아내던 그 소리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3년 전 꾸역꾸역 승점 3점을 깎던 욘스의 모습이 떠오른다

댓글 6

Hamsy 2019.07.11. 22:01
진짜 글 잘쓰셔...
댓글
Hamsy 2019.07.11. 22:02
 Hamsy
X태 횐님과 함께 투톱...
댓글
읻옹궈 2019.07.11. 22:06
타사이트에 올려서 포빨아먹고 싶은 글이네요;;
댓글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정보/기사 2025 FA예정 명단 18 김태환악개 5408 31
츄르토토 국내축구갤러리 츄르토토 규칙 + 국축갤 토사장 명단 42 Lumine 5356 27
정보/기사 2024 시즌 K리그1-K리그2 유니폼 통합정보 10 뚜따전 6731 11
자유 2024년 국내 축구 일정(K리그1~K4리그) 11 미늘요리 15376 36
에펨/로스터 국내축구갤러리 FOOTBALL MANAGER 로스터 공지 (7월 7일 베타업데이트) 120 권창훈 27723 57
가이드북 K리그1 가이드북 링크 모음집 13 천사시체 16842 39
자유 ❗이것만 있으면 당신도 프로 플스인! 개축갤 뉴비들을 위한 필독서 모음❗ 31 뚜따전 42043 45
자유 국내축구갤러리 2024 가이드 7 권창훈 30439 27
인기 20대 건실한 청년의 현재 잔고 ㅎㄷㄷ 25 기성용 358 36
인기 오우 진짜 분리당했네ㅋㅋㅋ 17 뽀블리 190 20
인기 나무위키에서 연고전 봤는데 이거 뭐냐 ㅋㅋㅋㅋㅋㅋㅋㅋ 4 고랭지동태 140 19
자유
기본
써치제국 1 0
자유
기본
달리 13 0
자유
기본
김병지의꽁지머리 12 0
자유
기본
조축의왕강현묵 37 3
자유
기본
기성용 29 1
자유
기본
윈터 37 2
자유
기본
아자라시 14 2
자유
기본
기성용 19 1
츄또[배당률]
이미지
임윤아 3 0
자유
기본
럭키금성황소 45 5
자유
기본
아자라시 25 3
자유
기본
춘식홍명보 15 0
자유
기본
달리 14 1
자유
이미지
아네트 52 6
자유
기본
사실은이렇습니다 18 0
자유
기본
기성용 9 0
자유
기본
달리 9 0
츄또[배당률]
이미지
시나모롤 7 0
자유
기본
진태호날두현 50 5
자유
이미지
보리스 6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