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프리뷰/리뷰 [축구저널 그날] 이동국, 전설이 되다... 2012년 3월 3일

글이 좀 길긴 하지만... 최대한 재미있게 써봤습니다

많이 봐주세요~~!

링크 들어가시면 오타 및 비문이 수정된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7638197&memberNo=6525744

[BY 센터서클] [센터서클 | 서건 대표] ‘축구선수’ 이동국에 대한 팬들의 평가는 항상 극과 극이다. 누...

 

 

 

축구선수’ 이동국에 대한 팬들의 평가는 항상 극과 극이다. 누군가는 ‘국내용’, ‘아시아용’, ‘물회오리슛’ 등의 단어를 쓰며 이동국을 비꼰다. 우선, ‘국내용’, ‘아시아용’이라는 별명이 생긴 이유는 두 차례나 유럽에 진출을 했으나 두 번의 도전 모두 실패로 끝났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미들즈브러에서의 아쉬운 활약은 이동국에 대한 팬들의 신뢰를 크게 떨어뜨렸다. ‘물회오리슛’이라는 별명은 2010년 남아공 월드컵 16강 우루과이전 후반 막판에 얻은 1대1 찬스를 놓친 것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이 장면 역시 이동국의 평판에 큰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동국의 슛이 들어갔으면 한국은 동점골을 넣었을 것이고, 경기는 2대2로 흘러갔을 판이었기에, 팬들의 실망은 극에 달했다.

 

 

그러나 이동국의 팬들은 이동국의 커리어를 매우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실제로도 이동국의 ‘축구선수’ 커리어는 높이 평가받을 만 하다. 이동국의 팬이라서가 아니다. 사실이라서 그렇다. 이동국은 대한민국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이었다.
 
독일, 코트디부아르, 코스타리카, 나이지리아, 세르비아-몬테네그로, 멕시코 등의 수준 높은 팀들에게 A매치 골을 기록한 선수가 어떻게 ‘국내용’이고 ‘아시아용’이란 말인가. 언제부터 아프리카 대륙, 중남미, 유럽대륙이 아시아에 편입되었다는 말인가. 물론, 득점 분포는 아시아 팀을 상대로 넣은 득점들이 더 많겠지만, 그건 차범근, 손흥민 등 대부분의 한국선수들도 마찬가지다. 아시아랑 경기를 많이 하니까 당연히 아시아를 상대로 넣는 골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또한, 이동국은 2000년 아시안컵, 2002년 아시안게임에서 대한민국을 말 그대로 ‘캐리’했다. 2006 월드컵 예선과 2014 월드컵 예선에서 대한민국을 월드컵으로 이끈 것 역시 다름 아닌 이동국이었다. 그러므로 이동국을 ‘국가대표팀만 오면 못하는 선수’라고 비난해선 안 된다.
 
이러면 또 “월드컵 본선에서 많이 말아 먹었지 않느냐!”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텐데, 실제로 이동국은 월드컵 본선에 딱 세 경기 나왔고, 심지어 1998년 네덜란드전에서는 극찬을 받았던 바 있다. 월드컵 본선에 별로 나오지 못했는데 뭘 많이 말아먹는단 말인가. 뿐만 아니라, 이동국은 A매치에서만 33골을 기록했는데, 이는 대한민국 4위 기록이고, 현역 선수로는 압도적 1위 기록이다. 이런 선수가 우루과이전 실수 하나로 그런 욕을 먹는 게 말이 되는가?

 

영원히 회자될 독일전 발리슛 골

 

여기에 아시아 최고의 리그라 꼽히는 K리그에서도 현재까지 224득점 77도움을 기록하며 역대 득점 1위 기록과 공격포인트 1위 기록을 계속해서 경신해내고 있다는 점 역시 결코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또한 AFC 챔피언스리그(이하 ACL) 통산 득점 역시 1위다. 감바 오사카에만 있었던 옆 동네의 엔도 야스히토를 보고는 존경할만한 선수라면서 이동국 보고는 ‘K리그용’이라고 비난하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도 이동국에 대한 두 입장 간의 대립은 아직까지도 매우 팽팽하다. 인터넷에는 서로를 겨냥한 수많은 악플들이 달린다. A매치를 위주로 보는 팬들이나 유럽 축구를 위주로 보는 팬들은 이동국을 욕한다. 반면에 K리그를 위주로 보는 팬들이나 전북 팬들은 이동국을 감싸고, 오히려 이동국을 욕한 사람들을 욕한다(무조건 그런 것은 또 아니다). 아마 이동국의 축구실력에 대한 평가는 10년 후까지도 식지 않을 ‘떡밥’이 될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동국이라는 선수는 적어도 한국 축구에서는 결코 무시 받아선 안 될 선수라는 점이다.
 
이번 시간에는 8년 전의 오늘을 추억해보면서 이동국이 K리그 통산득점 1위로 올라선 경기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8년 전... 지금 40세인 이동국이 32살 때 벌어진 일이다. 생각보다 먼 과거의 일인 것이다. 놀토가 사라진 게 2012년부터의 일이니 분명 생각보다 오래되었다.
 
 

#. 전북의 2011년
 
2011시즌은 전북의 역대급’ 시즌이었다K리그에서는 우승을 차지했고, ACL에서는 준우승을 차지했다. 에닝요와 이동국, 정성훈, 이승현, 김동찬, 루이스 등이 이끈 최강희 감독의 ‘닥공(닥치고 공격)’ 축구는 K리그 역대 최강의 축구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전북의 팬들은 ‘전북=승리’라는 공식을 머리에 새기기 시작했고, 경기장을 찾는 관중은 계속해서 늘어갔다. 그 촌스럽다던 ‘수박 유니폼’도 팬들의 눈에는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수박 유니폼

 

물론, 2011년에는 ACL 결승에서 ‘K리그의 적’ 알 사드에게 무릎을 꿇었던 가슴 아픈 일도 있었다. 당시 알 사드는 4강에서 수원팬을 폭행하는 등 민폐란 민폐는 다 보여주며 모든 K리그 팬들의 적이 된 바 있다. 그래서 K리그 팬들은 대부분 전북을 응원했다. 요즘엔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리고 하늘이 그 응원을 들었는지 에닝요의 환상적인 프리킥골이 터지며 전북이 앞서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알 사드는 알 사드였다. 심우연의 자책골과 케이타의 원더골로 역전에 성공한 것이다. 이에 전북은 부상 중이던 이동국을 투입하는 등 초강수를 두었지만 침대축구로 무장한 알 사드의 골문은 좀처럼 터지지 않았다. 들어가라는 골은 안 들어가고 골대만 흔들렸다. 그러나 전북이 어떤 팀이었는가. 닥공의 팀 아니었는가. 전북은 후반 막판 얻은 코너킥을 통해 골을 만들어냈다. 골의 주인공은 이승현. 4만 명이 넘게 들어찬 전주성은 흥분의 도가니로 변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전북은 승부차기에서 2대4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러야 했다.(결승전은 단판승부) 그리고 그 승부차기 패배 이후 전북은 지금까지도 승부차기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그래서 2011년은 전북에게 완벽한 시즌이라고 기억되지는 못한다. 5년 만의 아시아 정상 도전이 물거품이 되었는데, 어느 누가 이를 기뻐하겠는가. 특히나, 상대가 수원을 조롱한 알 사드였거니와 우승을 했으면 K리그가 ACL 3연패를 달성할 수 있었는데, 결국 실패했으니 K리그의 팬들 모두가 아쉬워했다. 4강에서 볼 수 있었더 마토의 펀치와 고종수의 발차기, 결승에서 볼 수 있었던 조성환의 오버액션은 결국 씁쓸한 추억이 되었다. 노래방에 나오는 임창정이 주인공인 ‘소주 한 잔 뮤직비디오’에서 깡패 임창정이 어떤 남자를 연타하며 때리는 ‘그 장면’에서 느끼는 시원섭섭함이 2011년 ACL을 추억하는 감정과 비슷할 것이리라.

 

 


#. 이동국의 2011년
 
그렇지만, 그럼에도 2011년은 전북에게 기념비적인 해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특히이동국에게는 매우 기념비적인 해였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의 실수는 이동국에게 큰 아픔이 되었다. 보통의 선수들은 그러한 상처를 딛고 일어나는 것을 매우 힘겨워한다. 특히나, 골을 넣는데 특화된 선수는 한 번의 실수가 부진으로 이어질 때가 적지 않다. 이동국의 경우도 슬럼프가 오기 쉬운 타입의 선수였다. 이동국은 언제 어디서나 마무리를 지을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었는데, 이는 육체적인 능력 뿐 아니라 정신적인 대담함도 갖춰져야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고 실수와 그에 대한 과도한 비난은 선수의 정신적인 부분을 위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동국은 달랐다. 보란 듯이 ‘미친 활약’을 보여주었다.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건 그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체 무엇이 그를 부활하도록 만들었을까. 바로 그가 택한 작지 않은 변화가 그의 활약을 이끌었다고 할 수 있겠다. 남아공 월드컵 때까지만 해도 골 넣는 것 하나에만 집중을 했다면, 그 이후에는 이타적인 모습을 통해 더 많은 공격옵션을 만들어내는 것에도 신경을 썼다. 예전까지는 로션, 향수만 뿌려댔다면, 이제는 깔창도 껴보고 옷도 잘 입어보는 사람이 된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어쨌든, 그는 2011시즌에 리그에서만 16득점 15도움을 기록하면서 포효했다. ACL(9득점)까지 합치면 총 25득점을 했다. 또한 그는 2011시즌에 리그과 ACL 모두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이동국은 K리그 도움왕, K리그 MVP, K리그 팬타스틱 플레이어, K리그 베스트11, AFC 챔피언스리그 득점왕, AFC 챔피언스리그 MVP 등 수많은 상들을 받았다.
 
또한, 그는 2011년 10월 3일 상주와의 경기에서 멀티골을 뽑아내며 5대1 대승을 이끌었는데, 이때의 멀티골로 인해 이동국의 통산 득점은 115득점이 되었다. 당시 K리그 통산득점 1위는 우성용 당시 인천 코치였고, 그의 기록은 116득점이었다. K리그 최고의 공격수가 되기 위해 단 한발자국만을 남겨두게 된 셈이었다. 다만, 시즌 막판의 부상으로 그 기록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 이흥실호의 첫 출발
 
그러나 전북과 이동국이 마주한 2012시즌의 시작은 찬란했던 2011시즌에 비해 너무나 어수선했다. 바로 최강희 감독이 국가대표 감독으로 ‘강제’ 차출된 것이다. K리그 팀 감독은 A대표팀 감독 제의가 오면 의무적으로 그 제의를 따라야 했기에, 최 감독은 그렇게 전북을 떠나게 되었다. ‘최종예선이 끝나면 전북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남기며 떠난 최강희 감독은 그렇게 전북과 잠시 이별하게 되었다.
 
이동국에게도 최강희 감독은 정말 특별했다. 미들즈브러에서 실패한 이동국은 성남에서도 실패를 경험한다. 그랬던 이동국을 팬들의 반대에도 데려와 부활시킨 감독이 바로 최강희 감독이었다. 최강희 감독의 지도 아래 최고의 선수로 거듭났던 이동국인데, 최 감독 없이도 완벽한 모습을 보여줄지에 대해서 팬들은 반신반의했다.
 
공석이 된 감독석에는 이흥실 수석코치가 앉게 되었다. 감독대행의 역할로서 팀을 이끌게 된 것이다. 이에 팬들의 의구심은 커졌다. 과연 이흥실 감독대행이 최강희 감독의 ‘닥공’을 문제없이 선보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이흥실호는 에닝요, 이동국, 루이스 등을 지킨 채로 드로겟, 김정우, 서상민, 최은성 등을 영입해며 팀 스쿼드를 강화했다. 이에 최 감독이 나감에 따른 선수들의 전력누수를 걱정했던 팬들은 그나마 안도했다. 또한, 이 감독대행이 인터뷰에서 닥공을 이어나가겠다는 이야기를 했고, 이흥실표 전북에 대한 팬들의 기대와 궁금증은 점차 높아졌다. 이와 함께 이동국의 K리그 통산 최다득점 기록 경신에 대한 기대 역시 높아졌다. 그리고 그러한 기대와 궁금증에 대한 첫 번째 답을 준 경기가 바로 2012년 3월 3일 전주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전북현대와 성남 일화와의 경기였다.
 
 

#. 이동국과 성남
 
상술한대로이동국은 성남 일화와 악연이 있었다. 미들즈브러에서 성남으로 복귀하며 다시 부활에 성공하나 싶었지만, 결국 성남에 적응하지 못했다. 2008년 동안 단 13경기에 나와 2득점밖에 하지 못한 것이다. 이후 당시 새로 부임한 성남의 신태용 감독은 이동국을 전력 외로 분류하여 그를 전북으로 보내버렸다. 이동국으로서는 매우 굴욕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사진은 기뻐보이지만, 성남에서의 이동국은 아쉬웠다.

 

그러나 이동국은 최강희 감독 아래서 기적을 써내려갔다. 그는 2009년 전북의 창단 첫 K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리그 MVP까지 수상했다. 굥교롭게도 당시 K리그 챔피언 결정전 상대는 신태용의 성남 일화였다. 물론, 이 경기에서도 이동국은 득점포를 가동했다.
 
그런 이동국과 성남이 2012시즌 K리그 개막전에서 다시 만났다다만, 이동국에게는 최강희 감독이 없었고, 성남에게는 모기업(통일교)의 재정난이 더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팬들의 관심이 줄지는 않았다. 리그 우승팀과 FA컵 우승팀이 펼치는 개막전은 이동국과 신태용의 악연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흥실의 ‘닥공’과 신태용의 ‘신공’이 맞붙는 경기라는 점도 주목을 받았다.
 
 

#. 전설이 된 이동국
 
경기를 생중계하는 방송사는 SBS였고, 캐스터와 해설위원은 각각 배성재와 박문성이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다. SBS의 개막전 중계도, 배-박 콤비의 K리그 중계도 너무나 먼 추억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아무튼 전북과 성남의 2012 K리그 개막전은 SBS의 생중계로 전국에 송출되었다. 전북은 김민식 골키퍼, 진경선-조성환-임유환-최철순의 수비라인, 박원재-김상식-루이스-황보원-에닝요의 미드필더라인, 공격수 이동국을 내세웠다. 성남은 하강진 골키퍼, 홍철-샤샤-윤영선-박진포의 수비라인, 한상운-윤빛가람-에벨톤-김성환-에벨찡요의 미드필더라인, 공격수 요반치치를 내세웠다.

 

https://www.youtube.com/watch?v=VKCi8uFE7KQ

 

경기 초반, 전북과 성남은 매우 강하게 부딪혔고, 팽팽한 승부를 가져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경기 시작 13분 만에 터진 이동국의 골은 그러한 예측을 깨부쉈다. 후방에서 상대 진영까지 연결된 김상식-루이스-황보원-이동국의 전개가 매우 날카로웠다. 특히 황보원의 로빙패스는 샤샤와 윤영선의 수비라인을 완전히 붕괴시켰다. 이 로빙패스를 받은 이동국은 골문을 비우고 나온 하강진 골키퍼를 보고는 재치 있게 왼발 로빙슛을 쐈다. 그리고 이 슛은 골이 되엇다. 116골. 타이 기록이었다.
 
5분 후 전북은 추가골을 넣는 데 성공했다. 그 주인공은 이번에도 이동국이었다. 이동국의 K리그 통산 117호 골이었다. 측면에서 올라온 크로스를 성남의 수비가 걷어냈으나, 이를 황보원이 끝까지 쫓아가 다시 페널티 박스 안으로 찔렀고, 이동국은 그 공을 받아 과감하게 슈팅으로 연결했다. 결과는 당연히 골이었다. 이동국은 엠블럼에 키스를 하고는 팬들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K리그의 새 역사가 쓰여지는 순간이었다. 32라는 나이에 이동국은 K리그의 전설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전설은 계속해서 쓰여지고 있다. 이 날 이동국이 개인통산 K리그 득점 1위가 된 이후 현재까지 단 한 명도 이동국의 기록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있다.

 

 

이 골이 더욱 의미있었던 또다른 이유는 최강희 감독의 지도 없이도 넣은 골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성남전 두 골을 통해 '이동국은 최강희 감독 없이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완전히 부숴놓았다.
 
 

#. 그 후... 이흥실 감독의 2012시즌
 
그러나 이흥실 감독의 2012시즌은 순탄치 않았다. 막상 그 개막전도 3대2로 승리는 했지만 뒷맛이 개운하지는 않았다. 전반 23분 박진포의 높은 크로스를 받은 에벨톤이 골을 만들어냈다. 후반 5분에는 롱패스를 받은 요반치치가 전방에서 버텨주고, 그 공은 넘겨받은 에벨톤이 드리블을 한 후에 슈팅을 때려넣으면서 2대2 동점이 되었다. 이동국과 교체되어 들어간 정성훈이 페널티박스 가까이에서 프리킥을 얻어냈고, 그걸 에닝요가 환상적인 골(후반 37‘)로 연결시키면 경기는 3대2가 되었고, 그대로 경기가 끝났지만, 전북으로서는 굉장히 찝찝한 경기였다. 후반 동안 이어진 성남의 파상공세에 전북은 큰 힘을 쓰지 못했다.
 
이러한 찝찝함은 단순히 기분탓이 아니었다. 전북은 ACL 조별리그 1, 2차전에서 각각 광저우 헝다와 가시와 레이솔을 만났고, 똑같이 1대5로 패했다. 이흥실 감독대행에게는 ‘오대일’, ‘흥겹게 실점’이라는 불명예스런 별명이 붙었고, 1대5라는 스코어는 흥실스코어라고 불리게 되었다. 결국 전북은 ACL에서 창단 최초로 ‘조별리그 탈락’을 하게 되었고, 리그에서는 서울에 밀려 2위를 기록하게 되었다.
 
다만, 위안 삼을만한 점은 성남전 승리 이후 전북은 7년 연속 개막전 승리를 거두게 되었고, 개막전 무패의 기록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최강희 감독이 2013년 6월에 돌아온 후 2014년부터는 전북이 K리그를 지배하게 되었다. 최 감독과 이동국은 5년 간 4번의 K리그 우승을 일궈냈고, ACL 우승까지도 만들어냈다. 우리가 2011년을 어느 정도 맘 놓고 추억할 수 있는 것도 이후의 ACL 우승 덕분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동국의 개인 커리어 역시 크게 성장했다. 2017년에는 200골을 기록했고, 2018년에는 70-70 클럽에 가입했다. 2019년에는 300 공격포인트 달성에도 성공했다. 2020시즌에 3도움을 기록하면 이제 전무후무한 80-80 클럽 가입에도 성공하게 된다.
 
 

#. 이동국의 기록,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
 
이번 글은 좀 멋지게 끝내보고 싶다. 바로 이동국을 보고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다시 말하는 것이지만, 이동국의 장점은 언제 어디서나 슈팅을 때릴 수 있다는 점이다. 공격수가 가져야만 하는 능력이다. 하지만, 가지기 굉장히 어려운 능력이다. 신체적인 균형, 체력, 근력 등이 모두 갖추어져야할 뿐 아니라, 결과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적인 부분에서의 용기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동국은 수많은 슬럼프들과 시련들을 겪었다. 독일에 진출했으나 실패했고, 잉글랜드에 진출했으나 실패했다. 2002년 월드컵에서는 히딩크 감독이 이동국을 뽑지 않았고, 2006년 월드컵에서는 큰 부상으로 월드컵에 나가지 못했다. 가까스로 나간 2010 월드컵에서는 욕이란 욕은 다 먹어야 했다. 힘들 수밖에 없는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이외에도 최강희 감독이 원치 않게 팀을 떠나는 등의 시련도 있었다.
 
그러나 이동국은 항상 일어났다. 시련은 이동국을 꺾지 못했다. 보통, 한 번 실수를 하면 트라우마가 생기기 마련이다. 고백을 했다가 차인 이후로는 여자한테 카톡을 하는 것도 무서워진다. 축구라고 다르겠는가. 하지만, 이동국은 그 트라우마를 바로 극복했다. 정신적인 부분에서의 무장이 굉장히 잘 되어있는 것이다.

 

 

마무리를 짓는 능력이 아쉬워졌다 싶으면 이타적인 능력을 키웠고, 때로는 2선, 3선까지 내려와서 수비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무리 능력을 소홀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수비 가담, 연계, 그리고 마무리 사이의 균형점을 찾으며 그는 계속해서 성장해왔다. 정신적인 부분 역시 계속된 경험으로 대담해지고 또 단단해졌다. 그리고 이제는 불혹의 나이까지 축구인생을 이어가는 선수가 되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문제는 그 실수로 인해 생기는 트라우마를 어떻게 극복해야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방법은 이동국처럼 생각을 비우고 다른 방법들을 계속 강구해보고, 또한 과거의 실수가 나온 부분을 다시 경험해보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실수를 딛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고 용감하게 살아보자. 또 아는가, 진짜 예쁜 사람, 진짜 잘생긴 사람을 만나서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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