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프리뷰/리뷰 [인터뷰]'축구판 투머치토커', '하나님 바라기' 김상엽을 만나다 ② (선수 김상엽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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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센터서클] ☆더욱 재미있게 읽는 법 : 1편을 보고 2편을 이어서 본다.☆[센터서클 | 서건 대표] 지난 ...

2편이 나왔습니다!

혹시 1편 안보신 분들을 위해 1편 링크를 추가하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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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센터서클] [센터서클 | 서건 대표] 한 축구선수가 은퇴를 선언했다. 지난 6월 16일 축구선수 김상...

여기 있습니다!

많이 봐주시고, 즐겁게 읽어주세요~~~!

감사합니다!

다음 3편과 4편은 좀 더 가벼운 이야기로 찾아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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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터서클 | 서건 대표] 지난 1편에서는 '축구선수 김상엽'의 성장기를 다뤘다. 이번 2편에서는 그의 성숙기를 다룬다.

그의 성숙기는 '겸손'이라는 단어로 정리할 수 있다. 호주 생활과 국내 복귀, 병역 수행과 은퇴.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었다. 불만족스러운 마무리라고 생각해 후회에 잠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겸손으로 가득 찬 그에겐 해당 없었다. 그의 성숙기엔 후회와 불만이 아닌 감사와 긍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서건(좌)과 김상엽(우)

 


#. 호주에서의 고된 생활

※ 이제는 축구선수를 그만두고 지도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 김상엽.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축구인생 성숙기를 '마음 놓고' 풀어내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마음 놓고'가 아니라 '마음 먹고'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의 입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결국 20분이 넘는 '롱테이크(long take, 장면을 끊지 않고 길게 촬영하는 영상기법)' 답변을 내놨다. 호주로 가게 된 이유를 물었을 뿐인데 선수생활 성숙기 이야기와 선수생활에 대한 그의 전반적인 감회까지 알 수 있었다. '투머치토커' 다웠다.

한국을 떠나 호주로 갔다어떻게 가게 된 건가.
    
일본이나 태국에서 살았던 경험 때문에 늘 해외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편견 없이 제대로 평가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한국의 어떤 팀들은 이력서를 쓸 때 학교를 쓰고 지도자 이름도 써야 한다. 난 그걸 보면서 ‘지도자 이름을 봐서 뭘 하겠다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와 관계가 좋지 않은 지도자가 지도한 학생이라면 뽑지 않겠다는 건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학교를 쓰는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이해하겠지만, 굳이 감독 이름까지 쓸 이유는 없다고 느꼈다.
    
불공정한 테스트들 접한 선수들은 ‘내가 부족해서 떨어진 게 아니라 이미 (결과가) 정해져 있어서 떨어졌다’는 식으로 남 탓을 하며 책임을 전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도 그렇게 돼있었다. 그런 내가 너무 싫었다. 내가 부족해서 안 된 건데 자꾸 남 탓을 하고 있더라.
    
그래서 해외를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해외 팀들의 입장에서 보면, 팀에 필요한 선수가 아닌 이상 나를 굳이 뽑을 이유가 없다. 용병이라는 직책에 대한 부담이 있기는 했지만, 팀이 나를 정말 원해서 뽑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너무 좋았다.
   
※ 공정성을 담보하는 사회여야 구성원들이 그 사회에 대해 신뢰를 보낼 수 있으며, 자유를 담보하는 사회여야 구성원들이 더욱 효율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뽐낼 수 있다. 이처럼 '공정'과 '자유' 라는 두 개념은 모두 사회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기에 한국 축구에서는 물론이요 더 나아가 한국 사회 전체에서도 두 개념 사이의 균형점을 찾으려는 지속적인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

땅에서 찍은 김상엽 지도자

 

해외 진출 방법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혼자서 미국 진출에 대해 알아보기도 했다. 공증 같은 걸 띄어가지고 절차를 밟으려 했는데 잘 안 풀렸다. 크로아티아 같은 동유럽 국가들도 알아봤다. 그런데 그 쪽(동유럽)은 사기가 엄청 많다. 실제로 그 쪽에서 사기를 당하고 오는 친구들을 많이 봤다.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러다 우연찮게 고양시민축구단에서 같이 있던 동생(편의상 A)이 호주에 가는 걸 알게 됐다. 그 동생(A)에게 물어본 결과, 고양에서 뛰었던 또 한 명의 동생(편의상 B)이 기회를 만들어줬다더라. ‘신태용 축구학교’라고 기성용 선수가 다닌 곳으로 유명한 곳이 있다. 그곳에 코치로 있던 그 ‘또 한 명의’ 동생(B)이 동료 코치와 함께 (신태용 축구학교를) 빠져나와 선수들에게 테스트 기회를 주는 활동을 따로 했다. 그 기회를 통해 호주에 가는 것이었다.
    
호주에 있는 동생(B)에게 연락을 했다. 나에게도 한번 와보라고 하더라. 그렇게 동생들의 도움으로 호주를 가게 됐다. 정말 신기했던 게, 내가 하려고 한 일들은 어려운 국면으로 흘러갔는데, 다른 쪽은 이미 계획이 세워져있던 것 마냥 일사천리로 ‘샥샥’ 풀렸다. 그래서 호주까지 가게 됐다.

 

호주 4부 리그 브리즈번 나이츠 시절 김상엽

※ 그는 2016년부터 2017년까지 호주에서 선수생활을 이어나갔다. 2016년에는 '브리즈번 나이츠'에서, 2017년에는 '로건 라이트닝'에서 축구를 한 그는 현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호주는 한국과 조금 달랐다. 2, 3, 4부 리그에서는 합숙생활을 하는 팀이 거의 없었다. 2부 리그 팀들 중에서도 정말 좋은 팀 정도만이 숙소를 제공해줬다. 그리고 선수들이 대부분 투 잡을 뛰었다. 그러다보니 선수들의 운동량도 그리 많지 않았다. 일주일에 네 번 훈련하면 많이 하는 것이었다. 급여 역시 많이 나오지 않았다. 물론, 지역마다 다르긴 해서 멜버른이나 시드니 쪽으로 가면 선수들에게 돈을 더 많이 줬다. 하지만, 그런 곳에 가려면 결국 경력이 있어야 했다. 내가 갔던 브리즈번 같은 경우는 선수들에게 돈을 많이 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일을 해야 했다. 원래 나의 하루일과는 운동을 하고 나머지는 그냥 쉬거나 몸 관리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을 해야 하니까 적응이 되질 않더라. 사실, 축구를 어느 정도 적당히 하면 일과 축구를 병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호주를 간 건 선수 생활을 끝내기 위함이 아니라 호주 무대를 발판삼아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함이었다.

 

호주 3부리그 로건 라이트닝 시절 김상엽

 

결국, 축구를 하면서 일까지 하다 보니 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좋은 퍼포먼스가 나오지 않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도 했다. 환경은 되게 좋았는데, 그 상황에서 내가 좀 더 위로 올라가는 건 힘들 것 같더라.
    
그럼에도 일을 해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정말 많은 일을 했다. 설거지, 이삿짐, 세차장, 타일 아르바이트 등 많은 일들을 했다. 특히, 타일 아르바이트는 해보니까 죽겠더라. 일만 하면 모르겠는데, 일과 축구를 병행하니까 몸만 망가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건 며칠 못했다. 어쨌든, 잡히는 일은 다 했다.
   
※ 축구하러 호주까지 가서 수많은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한 그였다. 호주 생활을 증오할 만도 했다. 나라면 호주행을 선택한 나 자신을 저주했으리라. 하지만, 그는 힘들고 고달팠던 호주 생활마저도 긍정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한편으로는 나에게 좋은 경험이었다. 난 축구를 10년 넘게 했으니 축구밖에 몰랐다. 호주에서 여러 가지 직종을 경험하다보니까 내가 무엇이 적성에 맞는 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나는 축구가 적성에 맞더라. 다른 일들 말고 무조건 축구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은퇴하더라도 축구계에 남아서 지도자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그 때 확실해졌다.
    
선수 생활 이야기를 하자면, 첫 해에는 호주 4부 리그에 들어갔고 이듬해에는 3부 리그에 들어갔다. 이후 2부 리그에 들어갈 생각도 했다. 그런데 비자가 만료됐고, 비자 연장을 하려면 학생 비자를 발급받거나, 농장에서 삼 개월 동안 일을 해서 '세컨 비자'라는 걸 발급받아야 했다. 집이 어려워 학생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는 여력이 안 되기도 했고, 군대 문제도 있어 거기까지 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다.
   


#. 한국 복귀, 그리고 군 문제

※ 한국으로 돌아온 축구선수 김상엽은 군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축구선수에게 현역 입대는 매우 치명적이다특히, 20대 후반이었던 김상엽에게 군 입대는 곧 은퇴를 의미했다.
    
호주에서 한국에 왔을 때 내 나이가 스물일곱인가 스물여덟이었다. 군 입대가 멀지 않은 상황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빨리 군대를 가라는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나는 선수생활을 이어나가고 싶었다. 어차피 은퇴를 하면 지도자를 할 텐데, 내가 축구선수로 뛸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뛰어보자는 생각을 했다. 현장에서 하는 경험이 지도자로서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계속 선수생활을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선수생활도 하나님께서 열어주셔야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매년마다 ‘하나님, 이게 맞나요.’ 라고 기도하며 나아갔는데, 정말 그 때마다 내가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을 통해서 길이 열렸다. 그렇게 일 년 일 년을 보내며 지내온 것이었다.

※ 그를 인터뷰를 하면서 가장 깊게 느낀 건 '인간 김상엽'이 내뿜는 감사와 긍정의 에너지였다. 좋은 추억을 말할 때도, 그리 좋지 못한 경험을 말할 때도, 그는 감사와 긍정의 메세지를 담아 이야기했다.

그러나 결국 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나오지 않았고, 군 입대를 결심했다. 의경을 신청했는데 추첨에서 떨어졌고, 10월 달에 철원으로 입대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입대가 확정되자 알바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남대문 시장에서 시계 도매 알바를 하기도 했고, 슈퍼마켓 진열 알바도 했다. 근데 그때 되게 신기했던 게, 곧 군대를 갈 놈이 알바가 끝나면 공을 들고 나와서 개인운동을 했었다. 나도 내가 이상했다. 축구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려서 개인운동을 한 것 같다.

그런데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소설도 이렇게 쓰면 욕먹는다.’ 군 입대를 앞둔 김상엽에게 정말이지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계속해서 축구선수를 할 수 있는 여건이 기적적으로 갖춰졌다.

원래 축구팀에 드래프트를 넣으면 심장 검사를 한다. 과거에 어떤 팀에 드래프트를 넣었더니 의사선생님께서 '심장 판막에 약간 문제가 있지만 정상인 수준'이라는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었다. 여자친구가 그걸 기억했고, 덕분에 나도 기억이 났다. 여자친구가 그거나 한 번 검사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해서 병원에 갔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는 공익 근무를 하게 됐다.

 

시계 도매 아르바이트를 할 때 이야기인데, 앉아 있다가 일어나면서 심한 어지럼증을 느꼈던 적이 많았다. 어느 정도였냐면, 엄청 어지러워서 벽을 잡고 있어야 했다. 나는 이게 군 문제 해결로 이어질지 몰랐다. 심장 판막에 이상이 없나 확인하기 위해 병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겪은 증상에 대해 말씀드렸고, 또 옛날에 공황장애를 심하게 앓던 것도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의사선생님꼐서 검사를 해 보자고 하시더라. 나는 그냥 안하려고 했는데, 혹시 모르니까 검사를 해보자고 하셨다.
    
검사 결과, 심장은 정상이었는데 '기립경 검사'에서 양성반응이 나왔다. (원래는 신체검사 등급이 1급이었는데 재신검을 통해) 4급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이게 무슨 일인가 했다. 그렇게 난 병무청으로 가서 4급을 받고 공익 판정을 받았다.

덧붙이자면, 병무청에서 공식적으로 4급을 받은 게 입대를 10일 남겨둔 시점이었다. 정말 다 내려놓을 때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내가 다 내려놓았을 때, 그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짐을 덜어주신다는 걸 느꼈다.
    
그렇게 군 문제가 해결(?)됐고, 뛸 팀을 찾기 시작했다. 예전에 태국으로 가기 전에 직지FC에서 운동을 했었는데, 그 때 같이 방을 썼던 형과 인연이 닿았다. 그 형과 그 형의 동료가 직지FC에서 오랫동안 선수생활을 하다가 직지FC의 후신(後身)인 청주FC의 감독·코치님이 됐더라. 그 분들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테스트 볼 수 있겠냐고 부탁을 했다. 다행히도 테스트를 볼 수 있었고, 공익 신분으로 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당시 청주FC의 사무국장 형도 도움을 정말 많이 주셨다. 하나님께서 선수 생활을 연장시켜주신거라고 생각한다.

 

청주FC의 김상엽

 

청주FC에 들어가서는 지도자 자격증들을 땄다. 내가 정말 존경하는 홍승균이라는 트레이너 분이 계신데,(지금은 경복궁역에서 짐을 운영하신다고 한다.) 그 분께서 말씀하시길, 사랑하는 분야에서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 분야에서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진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고 하시더라. 그리고 자격증을 따라는 말도 덧붙이셨다. 그 때 자격증을 따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청주FC 감독 형의 경우 일찍 지도자 준비를 시작하셨다. 서른다섯 살이 되기 전부터 A급 지도자 자격증을 가지고 계셨다. 그래서 선수들에게도 자격증을 딸 수 있게 지도자 강습회 등에 잘 보내주셨다. 그 해에 전문 스포츠 자격증, C급 지도자 자격증, 풋살 지도자 자격증을 다 따면서 지도자에 대한 준비를 했다.
    
그러다 청주FC가 사정상 공익 선수들을 모두 내보내게 됐다. 그렇게 팀을 나왔다. 옛날에는 공익 선수들이 팀을 옮겨 다닐 수 있었는데 그게 문제가 되니까 협회에서 제도를 바꿨고, 난 졸지에 팀을 못 옮기는 상황이 됐다. 그러나 다행히도 구제책이 생겨났고, 나를 포함해 비슷한 처지의 선수들이 구제명단에 오를 수 있었다. 팀을 옮길 수 있게 된 나는 뛸 수 있는 곳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난 공익이다 보니까 저녁에 운동을 해야 했는데, 주변 팀들을 찾아보니 저녁에 운동을 하는 팀이 없었다. 다행히도 ‘서울 유나이티드’라는 팀에서 공익선수들을 받아주겠다면서 저녁운동을 실시했다. 난 시흥시민축구단 사무국장 형의 추천으로 서울유나이티드 입단 테스트를 볼 수 있었고, 내 선수생활 마지막 팀인 서울 유나이티드에 들어가게 됐다.

 

서울 유나이티드(또는 서울 노원 유나이티드)의 김상엽

 

그러다 공익근무가 올 해 5월달에 끝났고, 6월달에 은퇴를 하게 됐다.
   


#. 선수생활을 돌아보며...

※ 자신의 선수생활 이야기를 끝마친 김상엽은 질문을 하기도 전에 스스로 선수생활에 대한 감회를 밝혔다그가 밝힌 선수생활의 핵심은 하나님이었다선수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한 동력도 선수생활을 그만두고 지도자로서 새 출발을 하게 된 계기도 모두 하나님이었다. 그야말로 '하나님 바라기'였다.
    
포기하지 않는다고 해서 선수생활을 계속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소속팀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매년 소속팀이 있었다. 19년 동안 매년 소속팀을 가지고 있었기에 지금까지 축구를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축구를 잘해서 축구를 계속한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한, 이렇게 나이가 있을 때까지 K3리그에서 뛰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현재 김상엽 씨는 서른 살이다). 금전적인 부분에서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다행히도 경주시민축구단같이 잘 챙겨주는 곳에 들어가서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리고 공익 근무를 하면서는 공익 월급이 나와서 그 돈으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올 해 5월에 소집 해제됐는데, 그 때까지 공익 월급으로 생활을 했다. 하나님께서 날 이끌어주신 덕에 19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선수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은퇴를 한 김상엽 지도자

 

사실, 선수생활을 좀 더 이어나가기 위해 베트남이나 미국으로 테스트를 보러 가려고 했다. 캐나다도 고민해봤다. 실제로 미국 몇 군데 팀들에서는 테스트를 보러 오라는 메일을 보내줬다. 아쉽게도 내가 공익근무를 하고 있어서 날짜가 맞질 않았다. 4월에는 베트남에 테스트를 보러 가려 했다. 표까지 끊어놨는데 코로나가 터지면서 흐지부지됐다. 하나님께서 축구선수로서의 문은 닫으시고, 다른 문을 여셨다는 생각을 했다.
    
살다 보면 과연 우리 앞의 벽이 뚫고 나가야 할 벽인지 아니면 뚫고 나갈 수 없는 벽인지 고민이 될 때가 있다. 나 역시도 그런 고민에 빠졌다. 뭐가 뭔지 정말 모르겠더라.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러다 응답을 받았고, 선수가 아닌 지도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 지도자를 추천했던 형에게 2018년부터 연락이 왔었는데, 올 해 또 연락이 오더라. 지도자 쪽으로 길이 열리니까 새로운 문이 열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 궁금증 해결 TIME

※ 그의 롱테이크가 끝나자, 난 그에게 몇 가지 질문들을 추가적으로 건넸다. 그는 어떤 질문에도 성실히 답했다. 축구 외적인 질문에도, 축구에 관련된 질문에도 그의 답변은 꼼꼼했다. 모든 대답에서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말했다.

호주에서 한 알바들 중에 기억에 남는 알바가 있나.
    
일단 진짜 힘들었던 건 타일 아르바이트랑 이삿짐 아르바이트였다.
    
그래도 나았던 이삿짐 아르바이트부터 이야기하자면... 짧으면 세 시간 만에 끝날 때도 있었는데 길면 열네 시간 열다섯 시간이 걸렸다. 하루는 집을 세 집인가 두 집을 옮겨야 했는데, 정말 실신하는 줄 알았다. 너무 힘들어가지고 기절하듯 누워있던 내 모습이 생각난다.
    
타일 아르바이트의 경우에는 새벽 네 시인가 다섯 시까지 일어나서 차를 타고 현장에 가야 한다. 거기서 대리석 깨고, 옮기고... 아, 그리고 골프 학교 기숙사 부엌에서 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같이 일하는 아저씨와 단 둘이서 부엌 전체 길이만큼 긴 대리석을 옮겨야 했다. 그 대리석을 드는데, 너무 무거웠다. 같이 일하는 아저씨에게 “이거 사람이 드는 거 맞나요?”라고 물어봤더니 사실 기계가 들어야 하는 거라고 하시더라. 결국 그 큰 대리석을 2층으로 옮겼다. 이제까지 들었던 것들 중에서 그 대리석이 가장 무거웠던 것 같다.
    
사실, 너무 다양한 일들을 해서 다 기억에 남는다. 꼬맹이들을 가르친 적도 있었다. 영어 잘하는 친구가 꼬맹이들을 가르쳐주는 일을 하면 내가 그 옆에서 보조로 도와줬다. 언어가 안 돼도 축구 용어 ‘패스’, ‘킥’ 이런 거 알려주고 하니까 재밌더라.
    
공익 근무는 어땠나힘들지는 않았나.
    
오송에서 공익근무를 했다. '보건복지인력개발원'이었나, 거기서 근무를 했다. 많은 분들께서 배려를 해주셨다. 밤에 축구를 하느라 근무 시간에 졸았던 적이 많았는데, 많이 봐주셨다. 그 때 같이 일했던 분들이랑은 지금도 연락을 하면서 지낸다. 이후 서울로 올라가서 공익근무를 할 때도 순조롭게 공익 근무를 했다.
    
선수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를 소개해달라.
    
※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투머치토커’ 박찬호는 강연을 할 때나 대화를 할 때대학교 재학시절혹은 LA 다저스 진출 초기 시절부터 이야기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놀라지 마시라. ‘축구판 투머치토커’ 김상엽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두 가지가 떠오른다. 하나는...

중학교 때 슬럼프가 심했다. 난 초등학교 6학년 때 일본에서 축구를 했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오니까 적응이 안되더라. (중학교) 선생님들이 보시기에 내가 하는 축구는 다 잘못된 것이었다. 창의적인 축구가 아니라 이미 정해져 있는 축구를 해야 했다. 예를 들면, 인사이드 패스 말고 아웃사이드 패스를 하면 싫어했다. 드리블하는 것도 안 좋아했다. 일본에서는 자신감 있게 축구를 하라고 배웠는데, 한국에 오니 너무 억압적인 축구를 해야 했다.
    
일본에서 겪은 좋았던 경험을 하나 말해주고 싶다. 한 점 차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드리블을 치는데 코치가 나보고 계속 드리블을 하라고 지시하더라. 자신감을 가지고 드리블을 했더니 다 제치고 골을 넣었다. 그 때 ‘축구는 자신감으로 하는 거구나’라는 걸 느꼈다.

그런 환경에서 축구를 하다가 한국에 왔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축구를 하지 못했을 뿐더러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그러니까 실력이 늘질 않더라. 새벽에 개인운동도 하고 했는데... 뿐만 아니라, 당시 내 취약점이 킥이었는데 킥이 뜨질 않아서 고생도 많이 했다.

 

학창 시절의 김상엽

 

그러다 중학교 졸업을 3, 4개월 앞둔 시점에 감독님이 나를 부르셨다. “네가 축구를 더 하면 고등학교에 가도 3개월도 못 버틴다. 그만 두는 게 좋을 것 같다.”라고 하시더라. 지금 돌이켜보면 나를 위해서 하신 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말을 들었을 당시에는 감독님이 미웠다. 축구를 계속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축구를 그만둬야 한다는 게 무서웠다. 사실 난 구타를 당하거나 정말 힘든 일을 겪어도 집에 이야기하지 못했다. 집에서 축구를 그만두라고 할 까봐 무서웠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참으면서 해왔다. 그만큼 축구를 그만둔다는 것이 무서웠다.

결국 감독님께서 할머니·할아버지를 불러 축구를 그만두는 것에 대해 말씀을 하셨다. 할머니·할아버지에게는 내 의사가 중요했다. 할머니가 그랬다. “축구 더 할래?” 난 그랬다 “더 할래.” 근데 속으로는 3개월도 못 버틸까봐 걱정이 됐다.

고등학교 진학 시기가 다가왔고, 초등학교 은사님께서 고등학교 하나를 추천해주셨다. 난 그보다 더 좋은 학교에 가려고 다른 곳을 알아봤다. 그러다 다시 초등학교 은사님이 추천하신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데 그 학교(초등학교 은사님이 추천해주신 학교)에 물어보니 티오(T/O)가 꽉 찼다고 하더라. 그 때 처음으로 기도를 했던 것 같다. ‘하나님 진짜 제가 이 팀에 못 들어가면 축구 그만 두라는 걸로 알겠습니다.’ 이러면서 기도를 했다. 그랬더니 일주일 후에 갑자기 자리가 한 개 빈다고 전화가 왔고, 그곳으로 진학했다.

 

김상엽 선수

 

거기서 정말 미친 듯이 했다. 청소 시키면 청소 열심히 하고, 축구할 때는 엄청 열심히 뛰고... 저녁에 따로 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리프팅을 300개 이상 못 찼다. 저녁에 나와서 리프팅 연습을 했다. 언젠가 1500개까지 할 수 있어지더라. 킥이 안 좋으니까 저녁에 킥 연습도 했다. 연습을 거듭하다보니 실력이 늘었고, 2학년때 코치님께서 더 이상 킥 연습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정말 기뻤다.
    
또한, 고등학교 재학 도중에 감독님이 바뀌기도 했는데, 감독님이 바뀐 이후에도 매사에 성실하게 임했다. 당시에는 축구할 때 형들 따라잡는 것도 다들 안 좋게 봤었는데, 난 끝까지 따라잡았다. 새 감독님이 나를 좋게 보셨는지 형들  경기를 뛰게 해주셨다.
    
그러다 언젠가 우리 학교가 문화부장관기 대회에 나가게 됐고, 16강에서 서귀포고등학교를 만났다. 결과는 승리였다. 그런데 마침 중학교 감독님이 그 경기를 보러오셨더라. 축구부 학생들 중에서 서귀포고등학교로 진학한 학생들이 많아서 오신 것 같았다. 그 때 우리 할머니께서 중학교 감독님에게 상엽이 뛰는 거 보이냐고 말을 거셨는데 감독님이 아무 이야기도 못하셨다고 한다. 그 때가 정말 기억에 남는다. 물론, (중학교 감독님이 나에게 한 말이)나를 위해 해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그게 동기부여가 되기도 했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또 기억에 남는 경기는...

 

2018년도에 있었던 김포시민축구단과의 경기다. 청주FC의 교체멤버였던 나는 팀이 0대2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경기 종료를 10분 정도 남겨두고 경기에 투입됐다. 그리고 골을 넣었다.

 

89분 들어간 추격골이 바로 김상엽의 골이다.

 

그 경기가 기억에 남는 이유는 마침 우리 할아버지가 경기를 보러 오셨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께 나의 골을 보여드릴 수 있어서 좋았다. 그래서 기억에 남는다.

뿐만 아니라, 내가 김포시민축구단을 상대로 넣은 골은 청주FC에서의 데뷔전 데뷔골이었다. 그 골로 난 4년 연속 데뷔전 데뷔골 득점에 성공했다. 경주시민축구단, 호주 3부, 호주 4부 청주FC에서 모두 데뷔전 데뷔골을 넣은 것이었다. 신기했다. 내가 그럴만한 능력이 안 되는데 하나님께서 날 도와주셨다.
    
선수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포지션은
    
미드필더를 제외한 거의 모든 포지션을 다 소화했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측면 수비수 포지션이다. 난 뛸 때 점점 가속을 붙여서 뛴다. 측면 수비수는 윙어보다 공격 시 뛰어야 하는 거리가 더 길다. 가속을 붙여서 뛰는 내 스타일 상 거리가 긴 게 더 좋았다. 그리고 측면 수비수가 윙어보다 크로스 기회가 더 많다. 내 강점인 크로스를 많이 올릴 수 있어서 좋았다. 사실, 크로스는 내 약점이었다. 그러나 최인영 코치님의 가르침을 통해 약점이었던 크로스가 강점으로 변했다.
    
포워드(최전방 공격수) 포지션도 기억에 남는다. 포워드로 출전해서 골을 넣은 기억들이 많다. 그래서 기억에 남는 것 같다.

공익이 된 게 마냥 좋은 건 아닌 거 같다. 기립경은 치료할 수 있는 건가.

정확한 명칭은 '혈관 미주신경성 실신'이다.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치료할 방법은 없고 그냥 일상생활에서 조심해야 한다더라. 목욕탕에서 뜨거운 물이랑 차가운 물에 반복해서 들어가지 않고, 앉았다 일어날 때 조심히 일어나는 등 일상생활에서 조심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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