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프리뷰/리뷰 [인터뷰] '성실·극복의 아이콘' 전상욱, 그가 되돌아본 선수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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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8753021&memberNo=6525744
전상욱 선수 인터뷰 입니다!
펨네 글 쓰는 방식이 이상해져서 자꾸만
글이 잘려요...
링크 들어오시면 가독성 높은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많이 읽어주세요~~~ 정말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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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터서클 | 서건 대표] '성실의 아이콘'이자 '극복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축구인이 있다. 그의 이름은 전상욱. 그는 프로 통산 133경기에 출전한 전직 K리거로, 현재는 성남FC U12(12세 이하)팀 감독을 맡고 있다.
전상욱이 살아온 축구인생은 '성실'과 '극복'의 두 단어로 응축할 수 있다. 그는 선수시절 성실한 모습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성장하며 팬들의 아낌없는 지지를 받았다. 지금도 많은 축구팬들이 선수시절의 전상욱을 추억하고 있다. 또한 그는 선수 인생 말미에 닥쳐온 병마를 씩씩하게 극복해내기도 했다. 그는 2016년 경 비인두암 3기 판정을 받아 축구로부터 멀어져야만 했다. 어쩌면 축구인생 뿐 아니라 인생마저 끝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전상욱은 보란듯이 시련을 극복해냈다.
병마를 이겨내는데 성공한 전상욱은 자신의 병명을 공개하며 팬들 앞에 다시 나타났다.(발병 직후에는 병명을 공개하지 않았다.) 다만, 선수생활을 계속 이어가지는 못했다. 2016년 5월 1일 광주FC와의 경기에서 교체투입된 걸 끝으로 전상욱은 자신의 선수생활을 끝마쳐야 했다. 그는 투병생활 이후 성남FC U12팀 감독으로 부임하며 새로운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다.
선수생활 은퇴 후 4년이 지난 지금, 과연 '감독' 전상욱은 '선수' 전상욱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는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선수생활을 복기했다.
<전상욱 프로필>
1979년 9월 22일 출생, 88kg(현재), 191cm
프로통산 133경기 151실점
-2004년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
-2005~2009 성남일화천마
-2010~2012 부산아이파크
-2012~2016 성남일화천마(2014년 이후 성남FC)
#. 인터뷰
만나서 정말 반갑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나.
성남FC U12팀 감독을 4년째 맡고 있다. 학년으로 따지면 초등학교 3, 4, 5, 6학년 학생들을 총괄해서 지도하고 있다. 3, 4학년 선수들은 U10팀에 속해있고, 5, 6학년 선수들은 U12팀에 속해있다. 다만, 좀 더 중점을 두고 지도하는 친구들은 5, 6학년 친구들이다.
아무리 은퇴 이후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어도 선수시절 모습이 선하다. 지금도 선수생활의 감이 남아있나.
많이 없어졌을 것 같다. 움직임도 그렇고... 특히, 이제는 초딩 친구들을 가르치다보니 성인무대에서의 감이 좀 죽은 것 같다.
당신은 승부차기를 잘 막는 걸로 정말 유명했다. 갑자기 승부차기 방어능력이 남아있는지 궁금해진다. 확인을 하기 위해 가위바위보 다섯 판을 해보자.
그게 승부차기랑 상관이 있나.
예측을 하는 거니까 상관이 있을 것 같다.
서건 보 : 바위 전상욱 - 서건 승
서건 바위 : 가위 전상욱 - 서건 승
서건 보 : 바위 전상욱 - 서건 승
서건 바위 : 바위 전상욱 - 무승부
서건 가위 : 보 전상욱 - 서건 승
아이 다졌네...
1무 4패다. 한 개도 막지 못했다. 지도자 생활에 열중하다보니 감이 떨어진 건가.
가위바위보로 그걸 판단한다고?
본론으로 돌아와서, 어쩌다 골키퍼를 하게 됐나.
'본격적으로' 골키퍼를 하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다. 난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 축구부에서 필드 플레이어로 축구를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5학년 선수들 중엔 골키퍼가 있었는데 6학년 선수들 중엔 골키퍼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4학년 선수들이 돌아가면서 6학년 경기에 골키퍼로 출전했다. 나 역시도 골키퍼로 출전했다. 근데 골키퍼로 출전한 경기에서 괜찮게 했나보다. 감독님이 다음날부터 골키퍼 연습을 준비하라더라. 내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골키퍼를 하게 됐다. 그러다 5학년부터는 본격적으로 골키퍼를 맡게 됐다.
어렸을 때부터 키가 큰 편이었나.
조금? 또래 애들보다 조금 크긴 했다. 엄청 크지는 않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커버린 건가.
지금 내 키는 191cm다. 중학교 3학년 때 갑자기 키가 쭉 크더라.
키 크는 방법을 알고 싶다.
음... 그런 건 없다. 잘 먹고, 잘 자고... 근데 우리 아빠, 엄마가 키가 엄청 큰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컸다.
아, 생각해보면 중학교 때 점프 훈련을 많이 한 것 같다.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는데, 배구선수나 농구선수처럼 점프도 많이 하고 줄넘기도 많이 했다. 그랬더니 키가 크더라. 연관성이 있는 것 같긴 하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단국대학교에 진학했다. 대학생활은 어땠나.
재미있었다. 3학년 때는 우승도 해봤다.
다만, 대학교 1학년 때는 청소년 대표팀에 불려갈 기회가 있었는데 무산되기도 했고, 4학년 때는 프로구단 입단이 무산되기도 했다. (대학) 생활 자체는 재미있었지만, 상처들도 있었다.
1학년 때 불려갈 뻔한 청소년 대표팀에는 (김)용대도 있었고, (이)동국이도 있었다. 프로 진출을 준비하던 4학년 때는 내 또래에 젊고 유능한 골키퍼들이 워낙 많았었다. 사실 (프로구단들) 몇 군데와 협상을 했었는데, 결과적으로 프로 입단 기회를 날려버렸다.
프로팀이 아닌 세미프로팀(미포조선)으로 갔다. 미포조선에 간 사연이 있나.
내가 대학교를 졸업할 당시에는 '계약금 제도'라는 게 있었다. 보통 대학교를 졸업하고 프로에 가면 잘 나가는 선수들은 계약금을 1억에서 3억 정도 받았다. 당시 프로에 가는 우리 또래 골키퍼들이 한 7명 정도 됐는데, 거의 다 1억에서 3억 정도는 받고 프로에 갔다.
나한테도 (프로구단에서) 오퍼가 오긴 했다. 근데 계약금이 5천만원에서 7천만원 수준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많은 금액인데, 당시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세미프로구단인 미포조선으로 갔다.
미포조선이 세미프로팀이긴 했는데, 거의 프로와 비슷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서 더 가다듬고 프로에 가고자 했다. 사실 미포조선에서는 돈을 많이 받지 못했다. 나중에 떳떳하게 프로에 가자는 마음 때문에그리로 간 것이었다.
성남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성남으로는 어떻게 갔나.
대학교 때부터 성남에서 날 유심히 지켜봐왔다고 한다. 사실 대학교 때 성남에게 제의가 오기도 했었다. 다만, 구단 사정상 이적을 하지는 못했다. 다행히도 2005년에는 조건이 맞아서 계약을 하게 됐다.
계약금은 얼마였나.
내가 성남에 입단한 해인 2005년부터 계약금 제도가 전면 폐지됐다. 계약금 말고 오로지 연봉으로만 돈을 받았다.
프로생활 하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
기억에 남는 순간들은 많다. 처음 성남 일화에 입단해서 좀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일화 시절의 성남은 돈이 많았었다. 그래서 좋은 선수들에게 최고의 많이 영입했었다. 반면, 경기를 뛰지 못하는 2군 선수들은 찬밥신세였다. 그래서 좀 힘들었다.
부산 아이파크에 있었을 때는 경기를 뛸 수 있어서 기뻤다. 부산에서의 3년은 축구를 하며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시기다. 행복했던 부산 시절도 기억에 남는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성남 시절 FC서울에게 6골을 먹었을 때가 기억에 남는다. 최다실점했던 경기였다. 부산에 있을 때 수원 삼성을 10년 만에 이겼던 경기도 기억이 난다. 아, 내가 성남에서 부산으로 갈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경기 역시 기억에 남는다. 부산에게 2대1로 이겼는데 그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부산에 갈 수 있었다. 그 경기가 어찌 보면 내 선수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
부산이적을 통해 선수인생에서 가장 큰 성장을 이뤄낸건가.
그렇다. 뛰고 못 뛰고의 차이가 정말 크다. 성남에서는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부산에서는 경기에 꾸준히 출전할 수 있었다.
'FM(Football Manager)'이라는 축구게임이 있다. 내가 감독이 되어서 선수를 선발하는 게임이다. 거기서 국가대표 1선발 골키퍼로 전상욱을 선발했었다.
고맙다.
월드컵에서 스웨덴한테 6대0으로 졌다.
또 6골 먹었네. 6골 먹으면 안되는데...
소감이 어떤가.
멘탈이 나갔을 것 같다.
실제로 6골을 먹힌 입장에서, 대량실점 했을 때의 기분을 알려달라.
1골, 2골까지는 실점 후에 선수들에게 동기부여를 해준다. 3골, 4골 먹히면 그때부터는 화가 난다. 아니, 3골까지도 괜찮다. 4골, 5골부터는 화가 난다. 나 자신한테도 화가 나고, 동료 선수들에게도 화가 난다. 6골부터는 뭐... 멘탈이 나간다. 아마 골키퍼들만 알 수 있는 기분일 것이다.
교육(훈련)받을 때 다른 골키퍼들이 대량실점하는 장면을 봤었다. 왜 저렇게 무너질까. 문제는 결국 '멘탈'이더라. 정신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게 중요하다.
2014년 FA컵 결승전 승부차기 직전에 박준혁 선수에게 뭔가를 알려준걸로 유명한데, 대체 뭘 알려줬길래 박준혁 선수가 승부차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건가.
아무래도 승부차기를 하게 되면 (내가) 경기에 투입될 것 같아서 분석을 많이 했다. 분석을 하면서 얻어낸 비법들을 (박)준혁이에게 알려줬다.
비법이란 게 대체 뭔가.
'분석'이다. 난 키커들이 이전 승부차기에서 어디로 찼는지를 보고 다음에 어디로 찰 지를 예측한다. 분명 상대팀 선수들은 내가 그들의 승부차기를 지켜봤다는 걸 알 것이다. 상대팀 선수가 얼마나 머리를 굴리는지 파악해서 방향을 예측한다. 여기서부터는 좀 복잡한데... 상대방이 한번 더 생각을 할 지, 아예 생각을 안 할 지, 생각을 많이 할 지 예측하는 게 필요하다. 너무 생각이 많으면 가운데로 찰 때도 있다. 아무튼, 서울과의 2014년 FA컵 결승전에서는 내가 한 분석들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진 것 같다.
페널티킥을 막을 때 어려웠던 사람이 있었나.
(이)동국이랑... 아, 지금 광주 감독님(박진섭)이 정말 페널티킥을 잘찼다. 강하게 차지는 않는데, 대신 정말 영리하게 찼다. 그 형은 페널티킥을 찰 때 골키퍼의 움직임을 보고 나서 찼다. 다른 팀으로 만나본 적은 없지만, 정말 잘 차더라.
(이)동국이 같은 경우는 웬만하면 발등으로 오른쪽을 노리는데... 언제 왼쪽으로 찰 지 몰라서 감을 잘 못 잡았다. 아, 그리고 모따도 (페널티킥을) 정말 잘 찼다.
최근에 이동국 선수가 페널티킥을 실축했다.
여태까지 해 온 걸로 봐서는 한 두 경기 못 찬 것 가지고 못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정말 오랜 기간 잘 해왔으니까... 한 두 번은 실축도 하고 해야지, 100% 다 넣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페널티킥에 관계없이 막기 어려웠던 선수가 있나.
데얀? 아무래도 용병 선수들을 막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병마 이야기를 하려 한다. 과거 병마(비인두암)와 싸웠는데, 아직까지는 완치가 아니라고 들었다.
암의 경우, 5년 간 아무 일이 없어야 완치 판정을 받을 수 있다더라. 이제 4년이 지났고, 완치까지 1년 남았다.
1년밖에 안 남았다. 완치되면 기분이 어떨 것 같나.
좋을 것 같다. 치료 받으면서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이 생각날 것 같다.
치료받으면서 힘든 부분이 있었는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회복을 했다지만 어쨌든 '암'에 걸렸던 거니까... 힘들었다. 체중이 20kg나 빠졌었다. 말도 아니었다.
축구선수 혹은 골키퍼로서의 전상욱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려 한다. 경기 중에 나이 많은 사람을 어떻게 불렀는지 궁금하다.
이름만 불렀다. 예를 들어, '영철!'이라고 했다.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서 썼다. 경기 중에 형이라는 호칭을 붙이면서 소통을 하지는 않았다.
골키퍼가 가져야 할 중요한 덕목이 있나.
골키퍼는 다른 포지션의 선수들보다 정적인 시간이 많다. 아무리 계속해서 집중을 한다고 해도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거기에 축구전용경기장 같은 경우엔 뒤에서 욕이 너무 잘 들린다. 아무래도 멘탈이 무너지기 쉽다. 멘탈이 중요하다.
멘탈 말고는 판단력이 중요하다. 나올 때 나오고 잡을 때 잡아야 한다.
어느 팀 관중들의 욕이 가장 크게 들리나.
경남...전북...수원... 오히려 서울은 괜찮았다. 꼬맹이들이 주로 욕을 해댄다. 이름 부르고... 쌍욕하고... 전북이 좀 많았었다.
가장 심했던 욕은?
'전상욱 dog baby' 이런 거? 그냥 다들 아는 '쌍욕'을 한다.
멘탈이 흔들리지는 않았나.
욕을 들을 땐 멘탈이 아주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다만, 원정경기에서 지고 있을 때 볼보이들이 공 안 주고 시간 끌 때... 와... 화가 나는데 표현도 못하고... 아이 정말... 아무튼 관중석에서 욕하는 걸 가지고는 크게 화가 나지 않았다.
상대팀 서포터즈한테 인사하기 싫었던 적도 있나.
그랬던 적은 없다. 상대 서포터즈들도 축구 좋아하는 사람들이고, 축구선수로서 그들에게 예의를 갖추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K리그에서 받은 경고만 총 15개다. 골키퍼 치고 많은 것 아닌가.
모르겠다. 15개... 많은 것 같지는 않다. 아마 이기고 있을 때 시간 끌어서 받은 것들일 것이다.
아까 볼보이들이 시간 끌면 화난다고 하지 않았나.
... 내가 한 건 필드 플레이어들이 코너 플래그 가서 버티는 거랑 비슷한 거다. 경기장 바깥에 있는 볼보이가 경기 진행을 늦추는 거랑, 경기장 안에 있는 선수가 경기 진행을 늦추는 건 다른 것 같다.
순발력 vs 안정감 둘 중 뭐가 더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하나. 그리고 당신은 순발력과 안정감 중 어떤 분야에 더 재능이 있는 골키퍼였나.
결과적으로 골 안 먹는 선수가 좋은 선수라고 생각한다.
(박)준혁이나 (김)영광이는 좀 순발력 좋고 빡빡한(?) 애들이고... 용대같은 경우는 안정감 있는 애다. 나는 따지자면 순발력보다는 안정감에 있어 강점을 가진 선수였던 것 같다.
골키퍼 하면서 클린시트 하면 기분 좋은지.
당연하다. 이기기까지 하면 더 좋다. 성취감이 느껴진다.
경기 중에 용변이 마려울 때가 있나.
음...? 그럴 수가 없는 게, 경기 전에 다들 화장실을 갔다온다. 그게 루틴처럼 돼있다. 경기장으로 출발하기 전에 한 번 누고, 경기 전에 또 한 번 누고... 경기 중에 뭐가 마려운 적은 없다. 경기 전에 음식 조절도 한다.
좋았던 지도자를 꼽아달라.
안익수 감독님과 황선홍 감독님을 꼽고 싶다.
안익수 감독님은 정말 치밀하시다. 계속 분석을 하시고, 선수 관리와 훈련 태도 관리에도 심혈을 기울이신다. 흔히 말하는 'FM(Field Manual)'이다. 나같은 경우, 안 감독님으로부터 정말 많은 걸 배웠다. 또한, 지도자 생활을 하다 보니 안 감독님을 닮아가고 있는 것 같다.
황선홍 감독님 역시 좋으신 분이시다. 내가 성남에 있을 때, 2군 선수들은 프로선수 대접도 못받았다. 근데 부산에 갔더니 황 감독님께서 날 프로선수로 취급해주시더라. 예전에 부산에서 뛸 때 수원에게 승부차기까지 가서 진 적이 있었다. 감독님이 내게 와서는 "왜 이렇게 풀이 죽어있냐. 누가 뭐래도 너는 우리 팀 넘버원 골키퍼다. 쳐져있지 말고 어깨 펴라"라는 말을 해주셨다. 눈물이 났다. 그렇게 인간적인 피드백은 처음이었다.
2편에서 계속...(아래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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