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준호의 여러 능력 중 올시즌 가장 가파르게 발전했다고 보여지는 부분이
경기시야와 경기장을 넓게 활용하는 경기운영.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경기시야라는 건
패스하려는 그 찰나에 선수가 확보하고 있는 시야라기 보다는
패스를 받기 전 이미 '다수'의 동료 선수 위치를 머릿속에 넣어둔다는 의미의 시야.
다음 수
그리고 그 다음 수가 막혔을 때
넓게 펼쳐져 있는 또 다른 선수를 활용하는 수
자신이 가진 수를 더 효과적으로 꺼내기 위해
사전에 상대를 속여놓는 수 등
볼을 쥐기 전에 이미 여러 수를 가지고 다음 플레이를 만들어 가는 모습.
따라서 손준호가 볼을 가지고 경기를 운영함에 있어
다음 플레이, 다다음 플레이를 이어가는 데 막힘이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이런 것들이 점점 익숙해지다 보니 좋은 의미로 최근에는 '기계적'으로까지 느껴질 정도.
확신을 가지고 플레이를 할 수 있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볼컨트롤의 안정감과 롱패스의 정확도도 올라가는 인상.
소속팀 전북의 모라이스 감독의 지속적인 수비형미드필더 기용과
국대 벤투 감독 전술 하에서의 수비형미드필더 조련으로
경기를 보고 읽는 눈이 뜨이면서
딥라잉플레이메이커로서의 경기운영능력이 한 궤도 올라선 것 같음.
개인적인 생각으로
여기서 조금 더 욕심이 나는 부분은,
개인으로서 상대선수와 경합하고 패스를 끊어내는 능력은 높은 수준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순간적인 상황에서의 수비포지셔닝, 혹은 수비전술에 대한 판단과 수비리딩능력이 좀더 보완됐으면 하는 것.
지난 국가대표팀 이벤트 경기 당시 장면
상대팀인 이승모가 패스를 받으려는 찰나. 이때 손준호의 포지셔닝은 딱히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음.
이승모가 볼을 컨트롤하려는 순간 상황이 변함. 상대팀의 윙포워드 송민규가 사이드에 위치해 있다가 하프스페이스 공간으로 내려와 이동.
이때 손준호가 같은 팀 풀백(김태환)에게 송민규를 막으라고 지시하고 자신은 현재의 포지셔닝을 고수.
하지만 이때 이승모의 전진패스루트는 전부 닫혀있고 오로지 송민규를 향한 루트만 열려있다는 걸 알 수 있음.
이승모가 송민규에게 전진패스를 한 순간을 보면
김태환은 상대팀 풀백의 오버래핑 공간도 신경을 써야했기 때문에 쉽게 송민규에 붙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음.
이때까지도 손준호는 송민규에게 전혀 접근하려는 생각이 없었음.
손준호의 잘못된 판단 덕분에 올림픽팀은 하프스페이스 공간을 여유롭게 활용하며 빌드업을 진행할 수 있었고
이후 김태환은 상대 풀백과 일대일 상황에 마주함.
여담이지만 여기서는 올림픽팀의 움직임도 아쉬움이 있었는데
만약 조규성이 왼쪽 사이드방향이 아닌 골문쪽으로 멀리 이동해 주면 풀백 김태환과 센터백 원두재 사이 공간이 벌어졌을 거고
송민규가 패스한 이후 멈춰 서있는 게 아니라 스프린트를 해서 계속 앞쪽 공간을 파고들어갔다면 김태환이 더 난감해 졌을 수 있음.
강원이 하프스페이스 활용에 있어 이런 정석적인 움직임을 잘 보여주는 팀.
오늘 FA컵 전북의 실점 장면에서도 손준호와 김보경의 수비포지셔닝과 커뮤니케이션에 아쉬움이 있었음.
원두재의 로핑패스를 이동경이 받으려는 찰나.
이 장면에서는 손준호가 잘못했다기 보다 어쩌다 보니 애매한 위치에 놓이게 됐다고 할 수 있을 거 같음.
손준호가 쉽게 뒤로 물러나기도, 이동경을 압박하기도 애매한 상황.
다만 후속적인 대처는 좀 아쉬웠음.
수비형미드필더 손준호와 전북 수비라인 사이 공간이 순간적으로 벌어졌다는 걸 윤빛가람이 눈치했고,
윤빛가람이 손준호가 비우고 있는 공간으로 슬며시 이동했음.
김보경은 윤빛가람의 움직임을 인식했고 어느정도 따라 내려가 주긴 했지만 이 수비포지셔닝이 충분치 않았다는 게 다음 장면에서 드러남.
만약 김보경이 하얀 원 위치까지 충분히 내려가 줬다면 더 좋았을 것임.
이동경이 윤빛가람을 발견하고 전진패스를 넣는 순간임. 김보경이 그 패스를 끊어보려고 했지만 정말 한 끝 차이로 발이 닿지 않았고
그 패스는 윤빛가람에게 전달이 되어버렸음.
전북의 포백라인 앞이 훤하게 관통 당했고, 결국 수비수들이 가장 싫어하는 상황에 노출되어 버림.
이 장면에서 손준호에게 아쉬웠던 건 울산의 이동경과 원두재 사이에서 볼이 왔다갔다 할 때
손준호가 주변 상황을 한번도 체크하지 않았다는 것.
만약 윤빛가람이 빈 공간으로 이동하는 걸 조금이라도 눈치 챌 수 있었다면
김보경에게 커버를 해달라고 요청하거나,
윤빛가람에게 향할 수 있는 패스루트쪽으로 조금이나마 수비포지셔닝을 이동할 여지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
암튼 이런 작은 차이가 결국 큰 차이로 이어지는 게 축구라는 것과
만약 월드컵처럼 모든 면에서 출중한 선수들을 상대한다면 이런 부분도 챙길 수 있어야 좀더 대응이 되지 않을까 싶음.
이탈리아 국적의 감독 알레그리 감독의 논문 중
4-3-3 포메이션에서 중앙미드필더를 역삼각형태로 둘 때
중앙미드필더 세 명이 수행해야 할 역할과 각 역할의 선수에게 필요한 능력을 기술한 부분이 있음
여기서 가장 공격적인 롤을 수행하는 공격형미드필더 외에
다른 공격형미드필더와 수비형미드필더에게 중요하게 요구되는 능력이 전술이해도와 포지셔닝감각이라고 언급하는데
특히 전술이해도는 다른 특징에 우선한다고까지 기술하고 있고, 수비형미드필더의 지휘능력 또한 강조하고 있음.
저번에 이승모와 이수빈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써먹었던 움짤인데
반대로 이 움짤을 전북의 관점에서 보면
손준호와 신형민이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 보다는 볼과 선수를 추적하는 성향이 강하다는 걸 느낄 수 있음.
개인적으로 최강희 감독 시절부터 전북의 중앙미드필더들이 이런 성향이 강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전북이 J리그 팀들에게 한번씩 두드려 맞는 경기를 할 때도 보면
미처 예측을 벗어난 전술을 준비해 나오거나 상대가 경기 중 전술변화를 꾀할 때 중앙미드필더들이 스스로 방법을 전혀 찾지 못하고
미들 공간을 너무 쉽게 내주는 경향이 있었음.
감바오사카랑 경기를 가졌을 때 최강희 감독이 최철순 수비형미드필더 시프트를 가동하면서 전술을 주고받은 경기들이 있었는데
오재석이 비하인드 썰을 풀어줬던 게 경기 중에 감바오사카 감독이 아닌
중앙미드필더 엔도가 최철순을 중앙에서 측면으로 빼버리는 전술변화를 지시했고 그게 먹혔었다는 것.
신진호도 서울 시절 잘 끌려나오는 전북의 약점을 지적하기도 했었음.
신형민, 정혁, 손준호 등 최강희 감독이 대개 이런 유형의 선수를 선호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최강희 감독이 이 선수들의 단점을 몰랐던 건 아니었을 거임.
왜냐하면 이재성 신인 시절 이재성의 장점을 얘기하면서 어떻게 이렇게 축구 다 알고 올라왔는지 신기하다고 할 정도로 그런 부분들을 칭찬했고,
실제로 처음에 사이드미드필더로 기용하다가 한동안 중앙미드필더로도 기용을 했었으니까.
그러다 이재성 포텐이 터지면서부터는 오히려 공격형미드필더 이승기를 중앙미드필더로 내리고, 이재성을 공격형미드필더로 올렸지만.
사실 몇 년 전까지도 k리그는 측면 공격 위주였고, 중앙에서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을 활용하는 전술을 잘 구사하지 못했기 때문에
최강희 감독이 k리그에 맞는 최적의 중앙미드필더들을 영입했다는 생각도 들고.
사실 오늘 실점장면에서 김보경의 포지셔닝에 아쉬움이 약간 있긴 했지만 김보경은 기본적으로는 저런 전술적인 판단을 잘하는 선순데
그래서 이재성과 김보경이 같이 뛰던 시절 전북 축구는 정말 완성도가 높았었고, 아챔에서도 높은 퀄리티를 보여줄 수 있었던 거 같음.
여기서 황인범 얘기를 해보자면,
황인범이 신인 시절 리그1 무대에서 반짝 활약했던 걸 제외하면 리그1에서 제대로 증명된 선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손준호를 제치고 국대에 입성했을 때도 의아하다는 반응이 꽤 있었던 걸로 알고 있음.
분명 기동력, 몸싸움, 태클 등 피지컬적인 면에서 손준호에 비해 황인범이 부족함이 있다고 생각되지만
반대로 황인범의 장점 중 하나는 벤투 감독이 이야기한 것처럼 공격과 수비상황 모두에서 전술적인 판단과 포지셔닝을 정확하게 해낸다는 거고,
상대의 전술변화에도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것, 정우영 등이 언급했지만 감독의 전술지시를 가장 잘 이해하는 거라고 할 수 있을 거임.
알레그리 논문 이야기에서 봤지만 감독에 따라서는 피지컬적인 능력보다 이런 전술지능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감독들이 분명 있을 수 있다는 것.
손준호가 주세종 대신 이번 벤투호에 소집된 걸 보면 지난 이벤트 매치를 통해 경기조율 면에서 합격점을 받은 걸로 보이는데
개인적으로는 한번쯤 손준호와 황인범을 파트너로서 내세우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전체적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황인범과 손준호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장면들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되는 면이 있음.
또 이제 모라이스 감독이 떠나고 김상식 코치가 감독이 되는 분위기인데
김상식 코치 역시 현역 시절 수비포지셔닝이나 예측, 공격차단 면에서 높은 수준을 보여줬던 선수였다는 점에서
만약 손준호가 다음 시즌에도 남는다면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최영준 역시도 수비지능 면에서는 리그 탑레벨이라 할 수 있는 선수기 때문에 손준호와 계속 뛴다면
손준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거 같기도 함.
손준호가 더 발전하는 모습이 궁금해서라도 한 시즌 정도는 더 손준호가 전북에 남았으면 하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