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프리뷰/리뷰 [이한울 인터뷰①] '축구에 진심인 편' 이한울의 비장미 넘치는 축구인생

전 프로축구선수이자 현 국가대표 풋살선수

이한울 선수를 인터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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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3092722&memberNo=6525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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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프로축구선수이자 현 국가대표 풋살선수 이한울과 전화 인터뷰를 진행했다. 1시간 동안 축구와 풋살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사연 없는 선수는 없다'는 말마따나 그 역시도 사연이 있었다.

 

이한울(오른쪽을 바라보며 포옹하는 선수)와 FC서울 시절 동료들.(출처 : FC서울)

 

어릴 적부터 그는 월반과 연령별 대표팀 소집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고등학교 때는 프로 산하 유스팀에서 손흥민(토트넘)과 한솥밥을 먹기도 했다.

그러나 부상이 그를 괴롭혔다. FC서울에 입단하며 프로 직행엔 성공했으나 1년만에 세미 프로로 무대를 옮겨야 했다. K3리그에서 4년 동안 축구를 하던 그는 결국 2015년을 끝으로 축구선수 은퇴를 택했다.

사실, 위 두 문단만 읽으면 '재능있는 선수였지만 부상으로 인해 안타깝게 축구를 그만둔 선수'만이 보일 것이다. 벌써부터 '뭐야 흔한 선수네'라는 생각을 하며 뒤로가기를 누르고 있는 독자도 있을 것 같다.

부상으로 인해 축구를 그만둔 선수는 흔할 지 몰라도, 그런 선수 한 명 한 명이 가진 이야기는 흔치 않다.

 

이한울(출처 : 서울노원유나이티드)

 

무언가에 전력을 다하는 모습을 인터넷 상에선 '~에 진심인 편'이라고 부른다. 이한울은 축구에 진심인 편이었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축구를 더 잘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그 힘이 이번 글의 핵심이자 이한울만의 사연이다. 인터뷰 1편을 통해 그만이 내뿜는 '비장미'를 느낄 수 있기 바란다.

※ 비장미 : 실현 의지가 현실적 여건 때문에 좌절될 때 느낄 수 있는 미(美)의. 부상과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축구를 계속하기 위해 끝까지 투혼을 발휘했던 축구선수 이한울을 통해 비장미를 엿볼 수 있다.
※ 1편에선 '축구선수' 이한울을 다뤘다. 2편에선 '풋살선수' 이한울을 다룰 예정이다.


1. 유소년 시절
-월반, 연령별 대표팀, 프로 유스, 그리고 손흥민

월반과 연령별 대표팀 소집은 뛰어난 유망주임을 보여주는 일종의 증명서다. 이한울은 어린 나이부터 월반과 대표팀 소집을 통해 잠재력을 증명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으로 연령별 대표팀에 소집됐다. 좋은 학교에서 뛰다보니 아무래도 좋은 성적을 내는 경우가 많았고, 자연스럽게 관심과 기회를 많이 받았다. 또, 운이 좋게도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월반해서 경기를 뛰었었다. 그런 부분들 덕분에 연령별 대표팀에 소집될 수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연령별 대표팀에서 뛰어보니 더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하는 친구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어린 나이에 두각을 드러낼 수 있었던 비결로 그는 배움, 스피드, 그리고 수(手)를 꼽았다. 이한울이 말하는 '수(手)'는 바둑 혹은 장기에서 두는 수를 의미한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수를 '바둑이나 장기 따위를 두는 기술. 또는 그 기술 수준'이라 정의하고 있다.)

"선생님들께서 잘 가르쳐주셨다. 그리고 다치기(고등학교 1학년) 전에는 남들보다 스피드가 조금 더 빨랐다. 거기에 조금의 잔머리가 있었던 것 같다. 남들을 경기장 안에서 속이는 재주가 있었다. 어렸을 적에는 '축구에 대한 수'가 나한테 있었던 것 같다. 덕분에 월반도 할 수 있었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성장을 하면서 그 수도 같이 늘었어야 했는데, 성장하는 속도가 제한적이다보니 수 역시도 많이 좋아지지 못한 것 같다."

이후 이한울은 2008년 FC서울 유스팀이었던 동북고등학교 축구부에 스카우트됐다. 이를 통해 'FC서울 유스 1기'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된다. (동북고등학교 축구부는 2007년부터 2012년까지 FC서울의 유스팀으로 운영됐다. 1기 선수들은 2008년 입학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했다. 프로 유스팀 입단 초기부터 큰 부상을 당했다. 몸의 반응 속도가 느려졌다. 축구를 계속 하기 위해 포지션까지 변경해야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무릎을 크게 다쳐 수술을 했고 1년 가량을 쉬었다. 그때의 부상은 지금도 있다.

수술을 하고 나니까 몸의 반응이 조금씩 느려지는 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구를 하고 싶어서 포지션을 변경했다. 중학교 때까지는 공격수였는데, 부상을 당한 이후 점차적으로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이한울은 경쟁에 뛰어들어 프로 진출의 꿈을 키웠다. 그는 동북고등학교를 이렇게 기억한다.

"감사하게도 동북고등학교로 스카우트됐다. 보통의 축구팀들은 상대팀과 경쟁을 하는데, 동북고등학교는 팀 내 경쟁이 정말 심했다.

또, 프로 유스팀이기 때문에 진학을 신경써주지 않았다. 일반 학원축구팀은 (실력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대학 입시 때문에 3학년 선수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는데, 프로 유스팀은 실력이 좋고 잠재성이 있으면 1학년이더라도 경기에 투입시켰다. 프로 유스팀의 목표는 더 좋은 선수들을 프로에 올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로 선수가 준비해야 할 것은 축구만이 아니다. FC서울 유스팀이었던 동북고등학교는 축구 외적으로 갖춰야 할 프로축구선수의 소양 역시 가르쳤다.

"축구는 기본이었고, 축구 외적인 부분도 많이 배웠다.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방법을 알려줬고, 축구와 관련된 조별과제와 대외활동도 했다. 그때 배웠던 것들이 지금까지도 머리 속에 들어있다. 나 또한 제자들에게 (FC서울에서 배운) 시스템을 도입해서 교육을 하고 있다."

이한울의 FC서울 유스팀 입단 동기 중 가장 유명한 선수는 다름 아닌 손흥민(토트넘)이다. 손흥민은 2008년 동북고등학교에 입단해 3개월 동안 K리그 유스로 활약하다 독일로 떠났다. 이한울에게 손흥민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물었다.

"잘했다. 지금이랑 스타일이 비슷했다. 당시에도 기본기가 정말 좋았고 스피드도 굉장히 빨랐다. 지금은 예전에 비해 힘이 붙고 세밀함이 더해진 것 같다.

저녁 개인운동 시간마다 함께 운동장에 나가서 선배들과 2대2 훈련을 거의 매일 했다. 나와 흥민이는 친구니까 같은 팀이었고, 선배 두 명이 상대팀이었다. 정말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흥민이는 항상 개인운동을 나가고 싶어했다. 그런 노력들이 쌓여 세계적인 선수가 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손흥민(출처 : EPA연합뉴스)

 

이한울에게 동북고등학교는 배움의 기억 뿐 아니라 짜릿한 승리의 추억을 남겨준 곳이기도 하다.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축구경기로 2009년 SBS 고교클럽 챌린지리그 결승전을 뽑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상암월드컵경기장 보조경기장에서 전남 드래곤즈 유스팀(광양제철고등학교)과 'SBS 고교클럽 챌린지리그' 결승전을 치렀다. 각 리그에서 1위가 올라와서 결승전(순위결정전)을 치르는 방식이었다. 우리가 0대2로 뒤지고 있다가 후반에 2대2를 만들었다. 이후 승부차기에서 (5대3 승리)이겼다.

지금도 정확히 기억이 난다. 정말 말도 안되는 승리를 가져왔다. 운도 따랐겠지만, 선수들이 정말 한 명 한 명 포기하지 않았기에 좋은 성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마 다른 동료 선수들에게도 그 경기가 축구 내적으로나 축구 외적으로 많은 도움이 됐을 것 같다."

참고로 당시 선제골을 넣은 광양제철고등학교 선수는 지금 제주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하고 있는 김영욱이다. 추가골을 넣은 선수는 경남FC, 인천 유나이티드 등에서 활약했던 이호석이다. 추격골과 동점골을 득점한 동북고등학교 선수는 현재 강원FC에서 뛰고 있는 정승용이다. 다들 K리그를 휘저었던(혹은 휘젓는) 선수들이다. 이한울은 그들과 함께 뛰며 꿈을 키우고 경쟁했다.

 


 

2. FC서울에서의 1년
-높았던 프로의 벽

경쟁 끝에 이한울은 2011년 FC서울에 입단하며 프로 진출의 꿈을 이뤘다. 당시 FC서울은 K리그 및 K리그컵 디펜딩 챔피언이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축구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FC서울에 입단하는 건 고교 시절의 꿈이자 목표였다.

FC서울 유스라서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볼보이도 많이 했고 경기도 많이 봤다. 그러면서 '나도 저기서 경기를 하고 싶다'. '나도 저 팀에서 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FC서울로 콜업되면서) 운이 좋게도 목표를 이뤘는데, 뭐랄까... 입단해서 좋긴 했지만 막상 좋은 건 얼마 안 갔다. 혼자 있는 기분이었다. 동료들 중 20살 선수가 나 포함 두 명이었다. 다른 신인 선수들은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입단했더라. 그러다보니 처음에는 스피드 면에서나 기량 면에서나 멘탈 면에서나 많이 힘들었다. 그래도 적응하려고 노력했고, 덕분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참고로 이한울이 말한 동갑의 입단 동기는 이동녘이다.)

 

이한울(출처 : 이한울 SNS)

 

1년 동안 이한울은 R리그에 주로 출전하며 실력을 쌓았다. 그러나 프로의 벽을 높았고, K리그 경기 출전엔 실패했다. 결국 2011시즌을 끝으로 FC서울을 떠나게 된다.

이한울은 FC서울을 통해 프로 무대가 무엇인지 절실히 느꼈다. 특히 FC서울을 떠난 이후 만난 은사와의 대화는 그에게 큰 깨달음을 줬다.

"FC서울을 떠난 후 동북고등학교 감독님께서 연락을 주셔서 찾아뵀다. 만나뵌 자리에서 내게 "프로는 보여줘야한다"라고 하시더라. 말씀을 듣는 순간 공감하고 인정하게 됐다. 난 경기장 안에서 '보여주는' 플레이를 잘 못했다. 너무 기본적인 플레이만 했다. 프로라는 건 뭔가 특색있고 특출나야 하는데, 그런 부분이 많이 부족했던 것 같다. 다른 좋은 프로선수들을 보니까 다들 (차별화된)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

그렇다면 이한울이 1년 동안 겪어본 동료 선수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는 누구였을까. 그는 울산 현대에서 활약 중인 고명진을 지목했다.

"울산 현대의 고명진 선수가 기억난다. 내가 20살 때 명진이 형은 25살이었다. FC서울에 있을 때 같은 포지션이었다. 팀끼리 자체경기를 하면 상대팀으로 경기를 하곤 했다. 축구에 대한 수(手)가 나와는 몇 배 이상 차이나는 걸 느꼈다. 내가 보지 못한 부분을 보고 계셨고, 내가 본 부분은 이미 확인을 한 상태셨다. 공을 본인이 소유하고 있을 때 순간적으로 속도를 내서 방향을 바꾸는 능력도 굉장히 좋았다. 기본이 탄탄하시면서도 상황에 따라 번뜩이는 플레이들을 보여주셨다. 나와는 너무 달랐다. 정말 잘한다고 느꼈다."

이한울의 SNS 배경사진은 FC서울 서포터들이 내걸었던 '선수단 이름 걸개'다. 이한울의 이름도 그 안에 포함돼 있다. 그는 FC서울의 팬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FC서울 팬들이 건 걸개. 이한울의 이름이 적혀있다.

 

"FC서울을 떠난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편지와 메세지를 보내주시는 분들이 계시다. 나를 더 뛰게 하는 원동력이다. 스포츠라는 게 팬이 없으면 조기축구나 공놀이밖에 안되지 않나. 팬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FC서울이 힘든 상황 속에서 강등되지 않고 버틸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물론 좋은 프런트와 좋은 선수들도 있지만."

프로 생활은 1년이었지만, 프로 무대를 준비하는 시간은 그보다 훨씬 길었다(3년). 총 4년의 시간을 FC서울과 함께한 셈이다. 이한울에게 FC서울은 무엇인지 물었다.

"축구선수로서, 인간으로서 좋은 기회와 경험을 준 팀이라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좋은 환경에서 좋은 대우를 받으면서 선수생활을 했다. 나 뿐 아니라 함께했던 모든 선수들이 그랬다. 이외에도 좋은 동료들이 있었고, 좋은 코칭스태프 분들이 계셨다."

그는 또한 FC서울 입단을 축구인생 중 가장 보람찬 일로 꼽았다.

"우리나라 최고의 팀이라 불렸던 FC서울의 선수가 됐다는 점이 (축구인생 중) 가장 보람있고 가장 의미있었던 일이다. 정말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항상 FC서울을 기억하고 있다. 나에게는 정말 큰 경험이자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3. 세미프로 그리고 은퇴

FC서울을 떠난 이한울은 K3리그의 서울노원유나이티드에 둥지를 틀었다. (참고로 당시 K3리그는 챌린저스리그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노원유나이티드 역시 당시엔 서울유나이티드였다. 또한 지금의 K3리그와 2019년까지의 K3리그는 이름은 같으나 엄연히 다른 리그다.) 서울노원유나이티드는 FC서울에 비해 환경이 다소 열악했다.

"훈련할 수 있는 팀이 많이 없는 상황에서 서울유나이티드를 가게 됐다. 초반에는 (FC서울과) 환경이 너무 달라서 심적으로 힘들었다. K리그와는 큰 차이가 있더라. 숙소도, 급여도, 인프라도, 모든 부분들이 달랐다."

그러나 축구에 대한 진심이 그를 다시 뛰게 했다.

"잠깐 힘들었지만 그래도 축구가 좋았고, 축구를 할 수 있는 팀이 필요했다. 그래서 홍천에서 서울로 버스로 출퇴근을 하며 꿈을 키워나갔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어려운 환경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땐 젊었기 때문에 힘든 것도 몰랐고 어려운 것도 몰랐다. 아침에 서울로 갔다가 저녁에 훈련 끝나면 막차타서 집에 내려오던 게 기억에 많이 남는다.

그렇게 했던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축구를 잘하기 위해서. 축구에 대해서 진실해지는 게 축구를 잘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이한울(출처 : 대한축구협회)

 

홍천군은 서울로부터 약 80km 떨어져 있는 '강원도'의 기초자치단체다. 그런 홍천에서 서울까지 월·수·금요일마다 출퇴근을 한 것이다. '축구에 진심인 편'이라 할 만 하다.

"지금은 길이 좋아져서 한 시간 밖에 안 걸리지만 당시엔 달랐다. 버스가 국도를 탔었다. 빨리 가면 집에서 운동장까지 2시간 정도 걸렸다. 3시간이 걸렸던 날도 있었다. 집에서 운동장까지의 거리가 멀다보니 다른 선수들보다 집에서 일찍 출발했다. 막차시간이 지나 동료의 집에서 잔 적도 몇 번 있다."

그렇게 이한울은 축구를 향한 열정을 가지고 4년 동안 총 3팀(서울노원유나이티드, 춘천시민축구단, 경주시민축구단)에서 세미프로 생활을 이어갔다. 4년의 시간 동안 이한울은 무엇을 느꼈을까.

"K3리그가 K리그1(당시 K리그 클래식), K리그2(당시 K리그 챌린지)보다 인기도가 낮은 리그인 건 분명하다. 그러나 K3리그를 경험해보니 어느 팀에서나 혹은 어느 리그에서나 열심히 하고 잘하는 선수가 되면 기회는 분명히 온다는 걸 느꼈다. 더 좋은 리그나 더 좋은 팀에서 뛸 때만큼은 아니지만 분명히 기회는 온다는 걸 느꼈다. K3리그에도 좋은 선수들과 좋은 지도자들이 많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이번엔 K3리그에서 활약하며 만난 선수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를 물었다. 이한울은 실력이 아닌 진정성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잘해서 기억나는 선수들은 꽤 있다. 대한민국에서 축구 잘하는 선수들이 정말 많더라.

축구에 대한 진정성이 높은 친구를 소개하고 싶다. 춘천시민축구단에서 같이 뛰었던 김현진이라는 선수다. 나보다 어린 친구인데 주로 세미프로에서 활동했다. 근데 뭐랄까, 내가 24살 때 이 친구가 20살이었는데, 나이에 맞지 않는 굉장한 인내심과 노력, 성실함을 갖고 있었다. 축구를 대하는 진정성이 남달랐다. '이 친구는 팀(춘천시민축구단)을 떠나도 뭘 많이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축구에 대한 노력을 많이 하는 것 같아 내가 보탬이 될 수 있는 부분에서 도움을 줬다.

예를 들면 운동의 경우 팀 훈련이 없을 때 시간을 내서 함께 훈련을 했다. 훈련 이후에는 카페에 가서 서로에게 축구 이야기를 많이 했다. 프로팀에 대한 경험이나, 축구인생에서 느꼈던 것들, 상위리그로 갈 수 있는 방법 등에 관해 이야기를 했었다. 꼭 축구 이외에도 축구선수들이 은퇴 후에 가질 수 있는 직업에 대해서도 많이 소개해줬다. 다행히 그 친구가 내 이야기를 잘 들여주고 내 경험을 존중해줬다."

춘천시민축구단에서 이한울과 함께 뛰었던 김현진 선수는 이후 대만 2부 리그에서 프로 진출을 이뤄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비록 한국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작년까지 대만 2부 리그 SFI FC에서 프로 선수로 활동했다. 지금은 한국에서 다른 세미프로 선수들처럼 팀을 알아보고 있다. 그 친구가 내게 큰 영향을 주었는지라 지금도 같이 연락을 하면서 축구에 대해서 많은 일들을 하려고 계획하고 있다."

 

김현진(출처 : 김현진 유튜브)

 

그러나 축구에 대한 진심에도 그는 은퇴를 택해야 했다. 부상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부상이 가장 컸다. 실력적으로도 (한계를) 느꼈다. 동북고등학교 시절 처음으로 수술을 하면서 몸의 모든 반응들이 전과 달라졌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무릎이 지속적으로 문제가 돼서 한 달에만 수술을 세 번 했다. 그러면서도 늘 축구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수술 이후 엘리트 선수로 길게 축구를 하면 무릎에 무리가 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수생활을 지속하는 게) 어렵겠다고 판단을 했다. 한 경기 혹은 한 달 정도는 뛸 수 있을 것 같았지만 1년, 2년씩 뛰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은퇴를 결정하게 됐다."

축구화를 벗게 된 그에게 축구인생에서 후회되는 일은 없느냐고 물었다.

"축구를 해서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힘들긴 했지만 축구선수가 된 건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축구인으로서 정말 행복했다. 물론 지금도 축구인이자 풋살인이며 스포츠인이다.

다만 아쉬운 감정이 들었다. 타인이나 팀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고 개인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왜 더 잘하지 못했을까... 더 잘했으면 지금보다 조금 더 오래 선수생활을 하면서 더 좋은 대우를 받고 있지 않았을까... 내가 더 빨리 축구에 대해서 느끼고 축구에 대한 수를 잘 키워서 더 뛰어난 선수가 됐어야 했는데... 잘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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