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문화 두두다다 깎던 노인

벌써 몇 년 전이다. 내가 갓 코치가 되어 영국에 정착한지 얼마 안 돼서 런던에서 살 때다. 첫 출근 날인가, 하여 에메레이트 스타디움으로 향하는 길에, 지하철을 타고 이슬링턴에서 내려야했다. 경기장에 도착하니 터치라인 벤치에 앉아서 무언가를 막 지휘하던 노인이 있었다. 경기는 난해해보였다. 마침 선수들에게 말해야 할 내용을 기록해야했기에, 노인에게 물었다.

"좀 골을 넣을 수 없겠습니까?"

했더니,

"골만 들어간다고 축구요? 보기 싫거든 맨체스터나 리버풀로 가시오."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골을 넣지도 못하고 승점이나 얻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이워비와 웰벡에게 몸풀기를 지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유효 슈팅을 조금 기록하는 것 같더니, 전반전이 끝나도록 이리 패스 해보고 저리 패스 해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거의 다 골이 됐는데, 자꾸만 공을 돌리고 있었다.
전반전도 다 되었으니, 하프타임 전 골만 넣어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이 걸려있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초조할 지경이었다.

"슈팅 시도가 부족하니 그만 패스를 주문하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아름다워야 축구지, 공만 찬다고 축구라고 할 수 있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챔스 진출권이 걸렸는데 무얼 더 아름답게 한다는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먼. 구단 운영비가 없다니까요."

노인은 퉁명스럽게,

"다른 경기나 보시우, 난 지금이 만족스럽소."

하고 내뱉는다. 리그 순위를 둘러보니 챔스 진출권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지시해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뻥축구가 된다니까. 축구란 아름답고 정교해야지, 뻥축구만 해서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미키타리안에게 안전한 패스를 요구하고는 태연스럽게 롱패딩에서 주머니를 뒤지고 있지 않은가. 주머니도 못찾는 그의 손 움직임에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관객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경기 결과와 자신의 노트를 들고서는 이리저리 휘갈겨보더니 다 됐다고 내 준다. 사실 다 정해지기는 아까부터 다 정해져있던 결과였다.

아스날에 오기 전부터 챔스 진출을 목표로 삼은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축구를 해 가지고 챔스에 갈 턱이 없다. 팬들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티켓 값만 되게 부른다. 개갱포래싱(開更暴來新)도 모르고 공만 돌리는 고집센 노인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에미레이트의 지붕을 바라보고 섰다. 그 때, 바라보고 섰는 옆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감독다워 보였다. 훤칠한 높이와 세월이 베긴 듯한 백발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노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된 셈이다.

집에 와서 아들놈과 경기 다시보기를 하니, 아들놈은 공 차는게 마냥 이쁘다고 야단이다. 뻥축하는 다른 팀들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것이나 우리의 것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결과라도 챙기는 그들이 더 나아보였다. 아들놈이 말하길, 양 팀이 뻥축만하면 서로 눌러앉기만 해서 보는 맛이 없댄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선수들만 해도 그렇다. 옛날에는 선수를 사면 유망주들은 얼마, 대충 기질이 있는 놈도 20M에 구했다, 월두크라수(月頭크羅水)는 세 배 이상 비싸다, 월두크라수(月頭크羅水)란 아홉 개의 전술에서도 아홉 번의 완벽한 경기를 한다는 것이다. 애무 축구만 해서는 월두크라수(月頭크羅水)인지, 먹퇴(薁退)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말을 믿고 사는 것이다. 신용이다. 지금은 그런 말조차 없다. 어느 누가 남이 보지도 않는데 아홉 번씩 다른 주문을 할 이도 없고, 또 그것을 믿고 세 배씩 값을 줄 사람도 없다. 옛날 하이버리 사람들은 이적료는 이적료요 주급은 주급이지만, 축구를 해내는 그 순간만은 오직 아름다운 축구를 만든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을 기울여 아트사커를 만들어 냈다.

이 경기도, 전술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노인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챔스를 나간담." 하던 말은 "그런 노인이 나 같은 젊은이에게 트로피와 승점을 강요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축구가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서 유망주나 유스 훈련 보고서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시즌 개막일에 경기장에 돌아가는 길로 그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노인은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편 상대편의 벤치에 있는 빢빢이를 바라보았다. 푸른 창공에 날아갈 듯한 머리 끝으로 햇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는 관중석을 돌아보았다. 아, 그 때 그 노인이 관중들을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롱패딩 주머니를 찾다가 유연히 관중석 끝의 어린 아이를 바라보던 노인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무심히 "추하게 이길 빠에야 아름답게 지는 쪽을 택하겠다."하는 크로이프의 어록이 새어 나왔다.

오늘 안에 들어갔더니 경기가 진행 중이었다. 전에 오바메양, 라카제트를 데리고 왔다며 골 넣을 생각에만 기뻐있던 내 모습이 생각난다. 아트사커를 구경한 지도 참 오래다. 요새는 두두다다 하는소리도 들을 수가 없다. 개갱포래싱(開更暴來新)이니 뭐니 투정를 자아내던 그 소리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몇 년 전 두두다다 깎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공지] 츄르내역_240102 19 조유리 3076 12
공지 [공지] 공지사항_220412 30 조유리 6539 64
취미/문화
이미지
슈화 22 2
취미/문화
이미지
슈화 125 10
취미/문화
이미지
슈화 67 4
취미/문화
이미지
슈화 50 4
취미/문화
이미지
슈화 136 9
취미/문화
이미지
슈화 34 3
취미/문화
이미지
너굴빠굴 24 2
취미/문화
이미지
꿀깅이 174 12
취미/문화
이미지
Carmine 68 4
취미/문화
파일
Carmine 450 4
취미/문화
기본
Carmine 52 4
취미/문화
파일
Carmine 171 3
취미/문화
이미지
슈화 46 3
취미/문화
이미지
슈화 131 13
취미/문화
이미지
강강해린 107 9
취미/문화
파일
Carmine 95 2
취미/문화
이미지
강강해린 148 8
취미/문화
파일
Carmine 171 7
취미/문화
파일
Carmine 205 9
취미/문화
이미지
슈화 128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