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문화 수필) 5:15, 218

  5분 25초짜리 곡 하나를 218번이나 들었음을 깨달은 날, 대다수는 평소와는 다른 감정을 느낀다. 다른 노래와 비교할 수 없을 수준으로 들었다는 걸 알고도 이를 당연하게 여길 사람은 별로 없다. 그렇기에 이걸 당연히 여기기 위해선 “남들도 다 좋아한다” 혹은 “역사에 길이 남을 명곡이다”와 같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를 요한다.

  그런데 가끔은 그런 합리성이 거세된 주장을 하고픈 상황이 있고, 나한테는 바로 저 218번이나 들은 노래가 그에 해당한다. 누군가에게 “그냥 들으면 좋잖아?”와 같이, 나 빼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논리를 들고 와 강요하고 싶을 때가, 살면서 많지는 않겠지만 분명히 있다. 이는 음악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 장르에서 통용된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누구나 다 좋아한다거나,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하나 둘 떼다 보면 결국엔 “그냥 들으면 좋잖아?”가 남고, 이런 답변은 애초에 주관이기 때문에, 결국 객관은 ‘가장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주관의 모임’이라고 말해준다. 그러니 시대마다 명작의 기준이 바뀌고, 각 세부 분야별로 평가 기준이 달라진다.

 

  그리고 시대가 꽤 지났음에도 평가 기준이 전혀 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아마 대표적인 사례가 문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시대가 지나며 담론의 폭은 넓어졌지만, 형식과 양식의 깊이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 손거울에서 전신거울로 변했다. 문학을 전업으로 삼아 출판 서적을 내기 위해선 이 정도에서 만족해야 한다. 누가 문을 두드리던지 결국 똑같이 “그 수준에서 만족할 수 있는가?”와 그리고 “이 형식대로 맞출 수 있는가?”를 따진다. 어떻게 보자면 지극히 공평한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신춘문예 당선작이라 통칭하는 소설, 시, 희곡, 평론 모음집은 늘 기준에 충실한 작품만을 추려낸다. 담론은 다를지 몰라도 형식은 늘 똑같다. 소재가 다를지언정 밀고 당기는 타이밍과 사람을 잡아당기는 형식은 비스름하다. 그리고 나 또한 그 형식에 맞춰가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렇지 않으면 배우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형식을 맞추지 않은 작품은 그 누구도 주관을 뚜렷하게 말하지 않는다. 단지 “어느 부분이 맘에 들었어”, “전체적으로 느낌이 뭔가 아쉬워”같은 두루뭉술한 접대어만 실없이 흘러나올 뿐이다.

 

  하지만 접대어의 조합들은 그 누구도 만족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전문적인 평을 받기 위해 형식에 맞춰 자신의 서사를 우겨넣는다. 새해 첫 날부터 자신의 작품으로 특별 지문을 장식하기 위해 애를 쓴다. 유명한 외국계 광고회사의 현직 카피라이터도, 어느 조그마한 교회의 목사와 한예종이나 중앙대같은 내로라하는 학교를 나온 학생들도, 스포츠 신문의 기자와 학교 선생님도 전부 비스무리한 느낌을 내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글을 쓰려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바로 그 느낌을 느끼기 위해 읽는다. 나도 그렇다.

 

  그렇지만 나는 그 느낌을 전혀 체득하지 못한다. 3년째 봐왔지만 늘 경외감만 들 뿐이다. 왜 저게 어떠한 주제의식을 내세워서 인정받는 작품이 될 수 있었는지를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그냥 작품을 읽고 심사위원들의 심사평까지 읽고 나서야 “아, 그렇구나”하고 말 뿐이다. 벌써 3학년이 됐지만 문단이라는 세계랑은 전혀 가까워지지 않고, 오히려 멀어지고 있었음을 체감한다. 단순히 책을 별로 안 읽고 글을 별로 쓰지 않는다는 핑계거리를 넘어서 나라는 사람이 가진 본질적인 문제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도무지 확실하게 잡히는 게 없다. 5분 25초짜리 노래를 별 다른 이유 없이 218번 듣는 것처럼, 그리고 그 사유를 비합리적인 것으로 들며 억지를 부릴 때처럼, 단지 나는 그런 이유에 대한 진지한 고찰보단 잠깐의 평온함을 택한다. 답도 안 나오는 문제를 굳이 머리 싸매봤자 속은 꼬이면 꼬였지 풀릴 일은 없으니까.

  그래도 언젠가, 누군가는 합당한 이유를 요구하게 된다. 그리고 나에게 그 순간이란 주로 공모전에 낼 작품을 퇴고하는 과정에서 누군가와 합평을 하게 될 때이다. 전부 다 “왜 하필 이 소재인데?, 이런 전개인데?, 그리고 이걸로 뭘 말하고 싶은데?”라는 질문을 쏘아붙인다. 그럴 때 내가 쓸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이란 “그때그때 쓰다 보니 그렇게 된 건데 이제 와서 뭐 어째?”다. 그럼 다들 “그래, 그때그때 막 쓴 거 치고는 잘 빠졌네”라고 덧붙이고 더는 말을 않는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내가 모자라다는 사실을 알면서, 형식을 맞춘 적이 없는 수준 미달의 글인 걸 알면서도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 양식을 맞춰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무시한 주제에 뭣도 모르면서 막 말한다고 여긴다. 그리고 결과물은 늘 진실을 깨닫게 한다. 이 업계를 가고 싶은 놈이 최소한의 기본도 갖추지 못했음을 통렬히 전달한다. 매년 똑같다. 이쯤 됐다 싶으면 슬슬 다른 생각을 가져야 할 때가 와야 하지만 그러질 않는다. 익숙한 게 최고니까. 그리고 바뀌어도 결과물이 온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잘못된 익숙함일지라 해도도 도저히 버릴 수가 없다.

  결국 시간만 빠져나간다. 매월 1일부터 쭉쭉 빠져나가는 각종 서비스들의 정기 이용료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돈 마저도 제대로 쓰지를 못한 채 그냥 비슷한 것만 맨날 반복해서 쓰기 위해 낭비한다. 어떤 영화를 반복해서 보고, 어떤 노래만 반복해서 듣는다. 위의 것들처럼 내가 내는 돈이 아니긴 하지만, 한 학기에 약 270만원을 요하는 고등교육이란 서비스의 정기 이용료도 이러한 경향의 연장선상에 있다. 언제나 바뀌지 않는 문학을 배우면서 늘 하던 일만 하고 새로운 걸 하지 않고, 매일매일 소소한 게 바뀌긴 해도 큰 틀이 절대 바뀌지 않는 학기를 보낸다. 영속성을 가진 걸 배우는데, 그 무엇보다 영속적인 관점에서 이를 거부하는 셈이다. 어쩌면 이 업계에 제일 적합한 마인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내 상태론 목표점에 절대 도달하지 못한다는 걸 확실하게 인지한다. 그러나 인지만 할 뿐이다. 5분 25초짜리 노래가 5분 24초에 도달해도 다음 노래로 넘길 방법을 모른다. 결국 또 같은 노래를 듣는다. 왜 그러는지, 어떤 식으로 바꿔야 하는지 확실한 답을 할 수 없는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5분 25초짜리 노래를 218번 듣는다. 같은 공모전에 늘 같은 수준의, 형식을 벗어난 글을 투고한다. 합평을 하면 늘 같은 질문을 받고, 같은 대답을 한다. 학기 중이나 방학 때나 언제나 그 순간에 맞춰 정해진 순서를 따른다. 맥주를 늘 정해진 주기에 정해진 양을 마신다. 담배를 늘 정해진 시간대에 태우고, 독서도 항상 정한 분량만 나아간다.

 

  이러한 쿠세들이 5분 25초보다 더 짧은 주기로 218번 반복되는 쿠세가 이어진다.

댓글 3

피카츄Alter 2020.04.25. 08:34
접속사가 너무 많아요
호흡이 자연스러우려면 없이도 전환이 되는게 좋다고 생각해요
댓글
피카츄Alter 2020.04.25. 08:45
악순환의 연속이다부터가 힘이 실린 문장, 글쓴이 목소리가 제대로 들어간 부분같네요.

그 윗부분은 읽고 싶은 문장의 테이스트가 없고 장르가 달라보입니다.
댓글
피카츄Alter 2020.04.25. 08:48
내용면에서는
끝이보이지 않는 터널을 달리는듯하고 망망대해에 작대기 하나 든 심정이겠죠.

힘든과정을 잘 이겨내고 얻는 바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댓글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공지] 츄르내역_240102 19 조유리 3076 12
공지 [공지] 공지사항_220412 30 조유리 6539 64
취미/문화
이미지
슈화 22 2
취미/문화
이미지
슈화 125 10
취미/문화
이미지
슈화 67 4
취미/문화
이미지
슈화 50 4
취미/문화
이미지
슈화 136 9
취미/문화
이미지
슈화 34 3
취미/문화
이미지
너굴빠굴 24 2
취미/문화
이미지
꿀깅이 174 12
취미/문화
이미지
Carmine 68 4
취미/문화
파일
Carmine 446 4
취미/문화
기본
Carmine 48 4
취미/문화
파일
Carmine 167 3
취미/문화
이미지
슈화 42 3
취미/문화
이미지
슈화 127 13
취미/문화
이미지
강강해린 103 9
취미/문화
파일
Carmine 91 2
취미/문화
이미지
강강해린 144 8
취미/문화
파일
Carmine 167 7
취미/문화
파일
Carmine 201 9
취미/문화
이미지
슈화 124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