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 소련군이 된 프랑스 파일럿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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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의 진주인공이자 유럽 최강의 대육군을 보유한 '열강' 프랑스. 1차 세계대전의 승전으로 말미암은 전투 교리의 경직화, 보수적인 군대 운용과 마지노선이라는 지나치게 강력한 방어선, 그리고 안일한 외교전으로 인해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의 초기 진압을 실패함은 물론,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입안한 '낫질 작전'에서 비롯된 나치독일군의 현란한(?) 기동전에 농락당하고 만다. 사실 놀아났네, 뭐네 하지만 독일군 입장에서도 낫질 작전은 이미 한 번 대차게 망했던 슐리펜 계획의 재탕일 뿐이었지만, 프랑스가 이렇게 빨리 '엘랑'을 할 줄은 아마 본인들도 몰랐을 거다.

 

아무튼, 전쟁 개전 후 고작 9개월 만에 프랑스가 따이는 대참사가 발생하고, 프랑스 망명정부는 좆같이 못 싸운 죄로 영국에서 망명정부 살림을 차리며 연합군의 눈치나 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본토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식민지들도 나치독일이 세운 괴뢰정권인 비시프랑스의 손을 들었으니, 연합군, 특히 영국의 입장에선 '도움도 안되는 씹새들...'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을 터다. (얼마나 거추장스러웠는 지 영국 해군은 자기들 손으로 프랑스 해군을 작살내고 만다.)

 

뭐, 제3공화국이 못 싸운 건 못 싸운 것이고, 영국으로 피신해온 자유프랑스 망명정부를 이끌게 된 샤를 드 골은 열악한 망명정부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싸우고자 결의했다. 모든 땅을 잃고 더부살이를 하게 된 1940년부터, 자유프랑스는 물밑에서 비시프랑스와의 치열한 외교전을 벌였는 데, 기존 프랑스의 해외식민지들을 자유프랑스와 함께 싸우게 하고자 하는 설득 작업이 그것이었다. 드 골에겐 운이 좋게도, 차드 총독이었던 펠릭스 에부에가 적극적으로 아프리카 식민정부들을 설득하며 적도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들이 자유프랑스의 관할권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거기에 미국의 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자유프랑스 망명정부가 프랑스의 정통한 정권으로 여겨지게 된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이후에 북아프리카 전선에서의 연합군의 승리로, 자유프랑스는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아프리카 식민지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탈환한 건 탈환한 건데, 문제는 이 모든 것들이 영국과 미국 형님들의 도움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자유프랑스군 또한 연합군과 종군하며 혈투를 벌이긴 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조공에 불과했기 때문에, 연합군 내에서의 발언권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드 골은 이대로 가다간 전후에 프랑스의 입김이 약해지고, 그렇게 된다면 애써 정권이나 식민지를 뱉어내야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드 골은 어느정도 자유프랑스군이 안정을 찾은 42년부터 '프랑스의 군인은 모든 전선에서 싸운다'는 명목 하에 전세계의 전선으로 자유프랑스군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소련과 독일이 캐삭빵을 벌이는 동부전선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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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전선이 한참 독일군의 절대 우세로 흘러가던 1942년 3월, 드 골은 스탈린에게 '님들 많이 힘들어보이는 데 우리 파일럿들 좀 보내줄까요?' 라고 제의했다. 근데 워낙에 뜬금없는 제안이었던 탓인 지, 스탈린은 완곡히 거부 의사를 보냈다. 그런데 42년 말쯤 되어서도 독일군의 우세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서서히 소련군의 방어도 한계에 봉착해가던 상황이었다. 특히 공중에서, 소련 공군은 독일의 루프트바페에게 제공권을 완벽히 내주며 크게 고전을 하고 있던 상황. 이미 이 때쯤 소련은 체면이고 뭐고 연합군 전체에게 손을 벌리며 열심히 물자를 지원 받고 있었기 때문에, 때마침 드 골의 제안을 기억해 낸 소련은 자유프랑스의 비행대를 지원받기로 결정한다. 11월 25일, 그렇게 자유프랑스군의 파일럿과 정비병들이 차디찬 동토의 땅으로 떠났다.

 

자유프랑스 공군 제3전투비행단은 14명의 파일럿과 52명의 정비병으로 구성된 작은 규모의 비행대였지만, 소령 장 툴라느(Jean Tulasne)가 지휘하는 이들은 무척 용맹했고 북아프리카 전선에서의 활약으로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이었다. 이들은 연합군의 지배력이 닿는 이란 방면으로 하여 소련에 입국했는 데, 문제는 이들은 몸땡이만 왔다는 것이다. 그도 당연하면 당연한 게, 전 국토를 뺏긴 자유프랑스한테 남는 전투기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제3전투비행단은 소련에게서소련제 전투기, Yak-1을 제공받았다. 새로운 전투기에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기 때문에 제3전투비행단이 본격적으로 전투에 뛰어든 것은 1943년 3월부터였다. 제3전투비행단 파일럿들은 대부분이 노르망디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들 비행단은 '노르망디 부대'로 명명되었고, 소련 공군 제1항공군 제303전투기사단 예하에 편제되어 전선에 뛰어들었다.

 

고작해야 14명의 파일럿에 불과한 노르망디 비행대였지만, 숫자가 적다고 해서 못 싸우라는 법은 없었다. 이들은 앞서 말했듯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이미 루프트바페와 혈투를 벌여왔던 베테랑들이었고, 제공권을 장악당해 허덕이던 소련 공군에 적잖은 힘이 되었다. 1943년 3월 23일 첫 실전 투입 이후 2주도 되지 않은 시점인 4월 5일 파일럿 알베르 프레지오시가 첫 루프트바페 공군기(포케불프 Fw 190)를 격추했고, 2주 뒤에는 소련 공군 폭격기 엄호 임무를 수행하며 2기의 Fw 190을 격추하는 데도 성공했다. 8일 뒤에는 3기의 노르망디 비행대 전투기들이 4기의 Fw 190과 조우해 3기를 격추시키며 동귀어진 하는 등 혈투를 벌였다. 1943년 가장 큰 격전이었던 쿠르스크 전투에도 종군한 노르망디 비행대는 이 전투에서 비행대 대장인 툴라느 소령과 부대장인 알베르 리톨프가 격추당했다. 쿠르스크 전투까지 노르망디 비행대가 격추한 적기는 30대에 달했다.

 

이들의 분투가 워낙 대단하다보니, 스탈린도 매우 만족하여 연합군과 소련의 우호의 상징으로써 이들의 활약을 적극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했고, 소련 공군에서 자유프랑스군의 파일럿들이 활약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빌헬름 카이텔은 자유프랑스군 파일럿들에 대한 즉결처형을 명령할 정도였다. 그러나 노르망디 비행대의 피해도 만만찮아서, 쿠르스크 전투가 끝난 시점에선 최초 파견된 14명의 파일럿 중 단 6명만이 생존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노르망디 비행대에 대한 증파는 꾸준히 이어져서 인도차이나 전역에서 활약하던 자유프랑스 공군 에이스 피에르 푸야드가 새롭게 노르망디 비행대의 대장으로 임명되었고 노르망디 비행대의 규모 또한 확충되어 43년 말쯤에는 휘하에 3개 중대(루앙, 르하브르, 셰르부르)를 거느린 상당히 큰 비행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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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전선에서 노르망디 비행대의 맹활약은 당연 이들을 파견한 드 골에게도 보고되었고, 드 골은 이 비행대에 '해방의 동지(Compagnon de la Libération, 2차대전 당시 자유프랑스를 위해 싸운 이들에게 주는 명예훈장)'를 수여했고, 1차 분견대는 72번의 승리와 86기의 격추(+16기 손상)를 기록하는 혁혁한 전과를 선보였다. 노르망디 비행대의 피해는 25기 격추였다. 북아프리카 전선이 완전히 정리되고 연합군 쪽으로 전세가 완전히 기운 1944년부터는 또 한 번 비행대를 확장해 4개 중대 체제가 되었고, 소련 공군 측에서는 이들에게 신형기인 Yak-3를 제공해주었다. 증편된 노르망디 비행대는 발트 방면 전선에서 대활약했는 데, 특히 1944년 11월부터 전개된 네만 강 도하 작전이 성공하는 데 아주 큰 공을 세웠다. 네만 강(메멜) 도하 작전에서 세운 공적으로, 스탈린은 이들에게 '네만'이라는 영웅 명칭을 수여하였다. 이 시점부터 이 비행대의 이름은 '노르망디-니에멘'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동프로이센 방면 공세에서 아무 피해 없이 41기의 적기를 격추하는 등 맹활약을 펼치며 소련 공군 소속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전과를 뽐냈다. 이런 활약에 아주 좋아 죽은 드 골이 직접 모스크바까지 와서 메달까지 수여할 정도였다.

 

아무튼, 노르망디-니에멘 비행대는 종전까지 소련군에 종군하며 최전선에서 필사적으로 싸웠고, 이들은 독일의 영토에 진입한 최초의 프랑스군 부대가 되었다. 전쟁기간동안 4354시간을 비행했고 5,240회의 임무를 수행한 노르망디-니에멘 비행대는 52명의 파일럿이 사망하는 동안 273번의 승리, 310기의 적기 격추(추정), 47기의 적기 파손과 159대의 지상차량 파괴, 13개소 지상목표물 파괴, 2척의 적함 격침 등 빼어난 전과를 올렸다. 그 어떤 프랑스군보다도 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대단한 전공을 올린 부대인 셈이다. 소속 파일럿들인 마르셀 알베르(23기 격추), 롤랑 드 라 팝(18기 격추), 자크 앙드레(17기 격추), 마르셀 르페브르(14기 격추, 1944년 전사)는 수 차례 전투 명예훈장과 적기 훈장을 수여받았고, 본국으로 돌아갈 때는 소련에 의해 소련에서 가장 높은 훈격을 가진 소비에트연방영웅 훈장을 수여받았고, 프랑스에서도 레종 도뇌르 훈장을 비롯한 각종 훈장을 서훈받으며 그 공적을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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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히틀러의 자살과 플렌스부르크 정부의 무조건 항복으로 유럽에서의 전쟁이 종전된 이후, 이제 노르망디-니에멘 비행대도 프랑스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스탈린은 이들이 보여준 전설적인 무공에 대한 감사로, 함께 전장을 누볐던 야크 전투기들을 갖고 프랑스로 돌아갈 수 있게끔 배려했다. 하여 프랑스 공군 소속으로 돌아간 노르망디-니에멘 비행대는 제트전투기로 대체되기 이전까지는 한동안 이들이 몰고 온 Yak-3을 운용하였고, 이들은 이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도 종군하는 등, 전후에도 전세계의 여러 전장을 누비다가 2011년 부대를 재편한 후 지금까지도 활동하고 있다. 

 

프랑스 공군의 노르망디-니에멘 비행대는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이 전설적인 부대에 대한 존경을 담아 소련 공군에서도 노르망디-니에멘 비행대가 창설되었다. 이들은 창설된 후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을 시작으로, 제11항공군 예하 부대로써 극동지역에 주둔한 채 활동하다가 2009년에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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