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문명 1950년대 한국전쟁의 상이군인들

한국전쟁은 무수한 비극과 상처를 만들어냈습니다.

 

그 가운데 이 글에서는 당시 상이군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image.png 1950년대 한국전쟁의 상이군인들

(1961년 2월 상이군인들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 현장)

 

 

1. 1950년의 군사원호법

 

의외로 상이군인에 대한 법률은 한국전쟁 이전에 이미 제정되었습니다.

 

 

미 군정 시기부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까지

 

군인과 경찰이 투입되어야 하였던 숱한 사건들이 벌어졌기 때문이죠.

 

4.3 사건, 10.19 사건처럼 굵직굵직한 사건부터

 

38선 일대에서 벌어진 셀 수 없는 숱한 국지전을 포함해서 말이죠.

 

image.png 1950년대 한국전쟁의 상이군인들
(1950년 1월 27~28일 옹진반도 일대에서의 교전을 보도한 기사)

 

 

그러다보니 임무/작전 수행 중 순직 혹은 부상당한 군인과 경찰과 관련한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합니다.

 

 

또한 지금이야 징병 연령대의 사람들 상당수가 대학생이지만

 

당시에는 직업을 가지고 결혼을 해서 벌써 자식까지 있는 사회인들이 대부분인지라

 

이로 인하여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 때문에

 

관련 대책이 필요했습니다.

 

 

그 결과 "군무에 복무함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장병 및 그 가족 또는 유가족의 생활불안정을 제거함으로써

 

군인으로 하여금 국가방위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법적 장치로서 군사원호법이 탄생합니다.

 

 

 

image.png 1950년대 한국전쟁의 상이군인들

(1950년 3월 군사원호법의 국회 통과를 알리는 당시 기사)



 

해당 법률은

 

제대군인, 상이군인과 그 가족, 전사자와 유가족을 위한

 

생계(지원금), 직업(고용), 수용(의료) 등 다양한 측면에서의 '부조'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원호'나 '부조'라는 명칭에서 보듯이

 

이는 근본적으로 '도와준다'의 지점에 가깝습니다.

 

미국의 제대 군인 관련 법률을 통칭 'the GI Bill (of Rights)'라고 지칭한다는 점,

 

즉 제대 군인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로서 이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과 비교한다면

 

그 인식의 차이가 확실히 느껴지죠.

 

 

나중에 기회가 있다면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그 때문인지 한국전쟁시기도 그렇고 그 이후도 그렇고

 

상이군인의 자세와 태도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동급식카드를 사용하는 아이들이 그것으로 비싼 걸 사먹는다고 무어라 하는 것처럼,

 

'원호'를 받아 사는 입장이니깐 그에 걸맞는 자세와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죠.

 

 

 

 

여하튼 법률은 제정되었습니다만 그 법률은 1950년 6월 1일자로 시행됩니다.

 

그리고나서 1달도 안되어서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죠.

 

그런데 이 법안을 만들 때에는 전면전 상황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디까지나 국지전 수준을 상정한 법안이었죠.

 

그렇기에 해당 법률은 대통령 시행령까지 존재했음에도 유명무실한 것이 됩니다.

 

이는 1950년대 내내 그러했죠.

 

 

 

 

2. 상이군인들이 직면한 열악한 현실

 

한국전쟁 당시 상황은 익히 알려져있듯이 굉장히 열악했고

 

이는 야전병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image.png 1950년대 한국전쟁의 상이군인들

(1951년 한국전쟁 당시 노르웨이 야전병원)

 

 

 

사실상 미군을 중심으로 하는 유엔군의 의료지원에 기대고 있었는데

 

의료인력에 비하여 부상자들이 워낙 많았던 터라

 

군의관들은 '신속하게 최대한 많은 사람을 살려 내는 데'에 중점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image.png 1950년대 한국전쟁의 상이군인들


 

이는 당시 미군 군의관의 회고 내용입니다.

 

평상시라면 '재건'에 방점을 둔 수술을 했겠지만

 

수술을 해야 할 환자가 많고 자칫 잘못하면 환자가 수술을 기다리다가 죽을지도 모르기에

 

가장 최단시간에 수술을 끝내고자 어쩔 수 없이 '절단 수술'을 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연하겠지만 이러한 부상자들은 다시 전선으로 투입될 수 없기에 후방의 병원으로 보내지는데

 

그 병원은 대부분 학교나 관공서 등의 시설에

 

그냥 간판만 병원을 내건 거에 가까운 터라

 

진통제 투여 외에는 치료나 재활훈련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image.png 1950년대 한국전쟁의 상이군인들
(1951년의 어느 육군병원 - 당시 정부관계자들이 방문한 상황)

 

 

 

마찬가지로 제대를 하더라도 그들의 생계와 관련해서도 아무런 대책이 없었죠.

 

이것 때문에 당시 군에서도 상이군인의 제대를 최대한 미루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제대를 하지 않으면 여전히 군인 신분이기에

 

그나마 피복과 식량을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보니 이들은 잠재적으로 사회에 불안을 야기할 수 있는 세력이 되었습니다.

 

1954년 당시 상이군인의 숫자가 14만 명에 달했던 만큼 그 숫자도 무시하기 어려웠죠.

 

 

 

칠곡경찰서 점거사건이나 초량역 사건과 같이

 

그 대우에 불만을 품고 상이군인들이 집단행동을 벌이고

 

이 과정에서 사망자까지 발생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였죠.

 

 

 

이에 정부와 군은 대응책을 고심했고

 

이 과정에서 전국 각 도에 '상이군인의 자활'을 위한 직업교육시설로서 "정양원"을 건립합니다.

 

 

 

image.png 1950년대 한국전쟁의 상이군인들

(1954년 서울 상이군인 정양원 기념식)

 

 

그런데 당시 정양원 생활을 했던 상이군인 분들의 증언을 보면

 

상이군인들을 한 곳에 모아놓기만 했을 뿐, 사실상 상이군인이 알아서 살아남는 것에 가까웠습니다.

 

 

 

image.png 1950년대 한국전쟁의 상이군인들

 

 

직업교육이나 관리가 없었던 터라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극장이나 유흥업소 문지기 혹은 관공서 수위 정도만 되어도 성공한 셈이었죠.

 

 

이에 1956년 정부기관과 기업이 상이군인을 사실상 무조건 고용하도록 하는 법안이 마련되었지만,

 

기업은 물론이거니와 정부기관에서도 상이군인 고용을 기피했기에 큰 실효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보니 아예 정양원 별로 농장이나 목장을 조성하는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계획만 세워줬을 뿐 그 비용은 해당 정양원 소속 상이군인들이 알아서 마련해야 했죠.

 

 

 

image.png 1950년대 한국전쟁의 상이군인들

 

 

위 증언은 제주 정양원의 화랑목장 조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상이군인들이 영화 필름을 구해서 제주 각지를 돌아다니며 상영회를 열었고

 

그 대가로 면사무소나 지역민들로부터 자금이나 가축을 받아서 목장을 세웠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목장이 실제로 운영되는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저렇게 하나씩 하나씩 비용이며 가축을 모으고 주거지와 각종 건물을 지어서

 

간신히 목장을 세웠던 시기가 1959년 9월이었고

 

그때 사라호 태풍이 한반도 남부를 휩쓸고 지나갔던 시기였던 터라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하죠.

 

 

 

물론 모든 상이군인들이 저랬던 것은 아닙니다.

 

단체로 몰려 다니면서 물건을 강매하거나 기부를 강요하기도 하고,

 

집단 폭행을 하는 등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죠.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저렇게 한 것을

 

순전히 상이군인들 개인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싶긴 합니다.

 

 

 

그 밖에 관련 법령에 따라 상이군인 및 그 가족들에게 연금을 지급하고자 하였지만

 

자동 지급이 아니라 당사자가 직접 신청을 해야지만 지급했을 뿐만 아니라

 

설령 신청을 하더라도 예산 문제 때문에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3. 상이군인의 결혼과 가정

 

한국전쟁은 죽음이 만연했고 죽음의 공포가 일상화되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역설적이게도

 

더 이상 군대로 끌려 갈 일이 없는 상이군인들이 1등(?) 신랑감으로 손꼽히기도 했습니다.

 

 

 

image.png 1950년대 한국전쟁의 상이군인들


 

 

그 연장선상에서 정부도 상이군인들의 결혼을 알선하는 일련의 정책을 추진합니다.

 

상이군인들에 대한 실질적인 보상이 어려운 상황에서,

 

그나마 결혼을 하게 되면 돌봐줄 사람이 생긴다는 인식에서 추진된 것이긴 하지만 말이죠.

 

 

image.png 1950년대 한국전쟁의 상이군인들

(1953년 상이군인 합동결혼식)

 

 

 

이 과정에서 상이군인으로서 겪는 개인의 고통이 가족의 고통으로 확장되곤 합니다.

 

 

image.png 1950년대 한국전쟁의 상이군인들


이처럼 전쟁의 '상흔'을 향한 주변의 시선이 자식들에게까지 마치 대물림되듯이 확장되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상이군인의 아내들이 겪는 고통도 상당했죠.

 

제대로 된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몸이 불편한 남편을 챙겨야 할 뿐만 아니라

 

가장의 역할도 하고 육아까지 책임을 져야했으니깐요.

 

 

image.png 1950년대 한국전쟁의 상이군인들

 

 

 

나가며

 

한국전쟁의 상이군인에 대한 대우가 열악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관련 글들을 읽어보면 생각 이상의 경우가 많아서 여러모로 참 씁쓸하네요.

 

 

 

 

이 글의 출처

 

다음 글에서 인용/번역된 증언을 활용하였으며 일부 내용을 재구성하기도 였습니다.

 

박은영, 「1950~60년대 상이군인의 이중적 입지와 일상 전략」, 『사학연구』 148, 2022.

박정석, 「상이군인 및 유가족들의 한국전쟁 경험」, 『호남문화연구』 30, 2002.

한봉석, 「한국전쟁기 의료지원 연구」, 『연세의사학』 49, 2021.

 

사진의 출처: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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