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글챌린지 러시아는 왜 이토록 호전적인가? - 박노자

개화기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잘 아는 일이지만, 그 때에 조선의 교양인들이 즐겨 읽었던 계몽 서적 중의 하나는 <彼得大帝> (광학서포, 1908)와 같은 러시아 황제 피터 1세의 전기이었습니다. 개화기 지식인들이 전제 왕국 러시아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점까지 염두에 두면 그들이 피터 1세 (1682~1725) 전기에 빠지곤 했다는 게 좀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그럴 만한 이유는 있었습니다. 서구 중심의 세계 체제에 뒤늦게 편입된 조선으로서는, 이런 편입을 이미 18세기 초반에 이룬 러시아는 어떻게 보면 "추격형 발전의 대선배"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부국강병" 내지 "식산흥업", "교육입국", 등의 표어로 표현될 수 있는 피터 식의 "서구화 개혁"들은, 조선 지식인들이 조선을 위한 하나의 모델로 그 때 생각했던 일본 명치 유신의 주역들에게 또 하나의 중요한 "참고 전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조선 교양인의 경우에는 피터 1세에 관심을 가질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크게 봐서 일본이나 한국, 그리고 러시아와 같은, 비서구 국가로서 서구 중심의 세계 체제에 "틈입"한 나라들의 역사 전체를 놓고 볼 때에 하나의 긴 "따라잡기" (追擊)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한데, 이 "따라잡기" 과정은 한-일, 그리고 러시아의 경우에는 서로 매우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1931-1945년 사이의 기간을 제외한 일본과 그 역사 전체에 걸쳐서 한국은 서방 패권 국가 (영국 내지 미국)의 "하위 파트너" 역할을 각각맡아 가면서 추격형 근대화를 위해 필요한 각종의 자원 (제도적 지식과 제도 기본틀, 기술, 차관, 판매 시장 등)을 그들로부터 받아온 것입니다. 일종의 "패권 국가와의 공존형 근대화 전략"이라 할 수 있는 거죠. 사실 이 전략은, 비서구적 세계의 "따라잡기"중의 사회 중에서는 가장 보편적입니다. 서방(과 중국, 한국, 일본 등)에의 석유 수출로 세계적 부자나라가 된 사우디나, 서방 등으로부터의 자본을 유치해 자본 거래의 허브가 된 두바이 등 걸포 국가, 아니면 해외로부터의 자원 채굴 내지 제조업 부문에의 투자에 의존해온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대체로 이 전략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따라 온 것입니다. 이 전략을 택하지 않고 좀 더 자기 중심적인, 자기 완결적 방식의 근대화를 지향하는 사회로 이번에 그 친선을 크게 과시한 러시아와 북한, 그리고 중국 내지 1979년 이후의 이란을 들 수 있는데, 북한과 중국, 이란을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하고, 이번 기회에 러시아의 문제를 다루어보도록 하죠.

사실, 러시아도 그 어느 주변부적 사회처럼 어디까지나 "종속적 발전"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소련은 말로는 "내포적인", 자기 완결적인 근대화를 외쳤지만...1970년에 그 생산이 시작된 소련의 "국민 자동차" VAZ-2101는 이탈리의 Fiat 124의 복제판, 즉 다소 어설픈 모조품에 불과했습니다. 전 그 맛이 하도 안좋아 별로 안마셨지만, 제가 학교에 다녔던 1980년대에 소련 초중고 학생들이 애용하는 음료는 소련에서 로얄티를 내고 생산했던 "펩시콜라"이었습니다. 역시 전 전혀 좋아하지 않았지만, 제 동급생들이 들었던 음악이라고는 이탈리아의 토토 쿠투뇨나 아드리아나 첼렌타노가 그 주종을 이루곤 했죠. 전 1980년대말에, 제가 구미권의 주변부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이미 몸으로 느끼고 있었던 거죠. 당의 구호와 관계 없이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최근 러시아에서 "발전"이 있었다면 대체로 구미권에서 발명된 신제품들에 대한 "대체 제품"을 만드는 것이 그 주종이었습니다. 비슷한 기술을 사용하며서 말입니다. 예컨대 vk.ru 등은 "러시아판 페북", yandex.ru는 "러시아판 구글" 역할을 하는 거죠. 이건 - 일본이나 한국과 다를 게 없는 - "종속적 발전"의 전형입니다.

한데 러시아는 일본이나 한국식 발전 궤도와는 한 가지 큰 차이를 보입니다. 러시아는 엄청난 규모의 국가 폭력 기구, 즉 군대와 보위부 (FSB), 첩보 기관 등을 갖고 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군을 포함한 모든 "sylovye struktury" (내무부, 러시아친위대, 보위부, 대통령 경호부 등등의 국가 폭력 담당 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총수는 지금 3백만 명에 가깝습니다. 45명의 러시아 성인 중의 한 명은 이런 기구에 종사하고 있는 거죠. 참고로, 예컨대 미군의 전체 종사자 숫자는 (제복을 입은 군인 신분의 피고용자와 민간인 신분의 피고용자를 합해서) 1백30만 명에 불과합니다. 러시아의 비군수 부문 제조업이나 금융, 교육, 연구 센타 중에서는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는 데는 별로 없습니다. 예컨대 러시아의 최대 은행인 국영 은행 스베르방크는 그 규모는 세계 58위로, 한국의 KB그룹보다 약간 크긴 하지만, 북구의 노르데아보다 좀 작은 자산을 갖고 있는 은행입니다. 러시아의 최대 기업은 국영 기업인 가즈프롬 (Gazprom)이지만, 그 연간 총수익 규모는 세계에서 42위로, 삼성 재벌 (26위)의 약 65%에 불과합니다. 즉, "자본의 러시아"는, 글로벌 세계의 시각으로 본다면 글로벌 "중소 기업" 정도가 됩니다.

사실 러시아의 학술-교육, 아니면 대중 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최종 학위를 받은 곳이기도 하지만, 러시아의 "최고 학부"인 모스크바국립대의 QS랭킨은 87위밖에 안됩나다 (참고로, 서울대는 41위입니다). 러시아 대중문화의 "깃발" 같은 존재로, 이번에 푸틴의 침략을 비판하고 러시아를 떠난 가수 알라 푸가쵸바 등을 들 수 있지만, 그 인지도는 러어권 밖에서는 거의 "제로"에 가깝습니다. 한데, 금융 등 비즈니스나 교육, 연구, 대중문화 부문과 대조적으로는, 군사 부문에서는 러시아는 여전히 미국 다음의 "2위 대국"으로 통합니다. 우크라이나에서 고전을 면치 못해도 그 만큼 핵무기와 포탄, 미사일 등 제조 능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늘 무력 위주의 개발의 궤도를 선택할 유혹을 국가가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그러는 것처럼 고전을 면치 못해도 일단 큰 패배를 당할 확률은 적습니다. 어느 정도의 영토를 강탈하고 나서 그걸 사수할 만한 양의 전차와 대포, 포탄, 미사일을 제조할 만한 능력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수를 하는 과정에서는 전시 특수가 발생돼 무기 공장 뿐만 아니라 그 공급 업체나 도급 업체 등도 상당한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군사 케인스주의적" 경제 부양책으로 러시아는 금년에 나름의 경제 성장 (약 2,5% 정도 예상)을 이루려 하는데, 이는 예컨대 독일 등 유럽의 주요 경제들과 대조적이기도 합니다. 즉, 전쟁은 "자본"이나 "연성 권력"의 측면이 약한 러시아 지배자들이 가장 쉽게 구사할 수 있는 정치 수단이며, 그 수단을 활용하면서 러시아 국가와 자본은 "이윤"도 챙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과 같은 호전성을 목격할 수 있는 것이죠.

러시아의 대외 침공의 가장 약한 고리는 결국 무엇보다 "사람"입니다. 아직까지는 우크라이나 침공 등에 동원되는 러시아 지방 빈민들의 대부분은, 러시아의 서방과의 대립 과정에서 발생되는 침략 전쟁들을 최근 푸틴을 만난 김정은이 구사한 표현대로 "신성한 싸움" 정도로 여기고 있습니다. 즉, 그들이 1차적인 정체성은 러시아의 "인민"이지, 자본화된 러시아에서 착취를 받으면서 사는 "노동 계급"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정체성이 "인민적인" 것에서 "계급적인" 것으로 바뀌고 "신성한 싸움"이 계급 투쟁을 지칭하는 단어로 그 의미를 바꾸면 러시아가 아마도 좀 달라질 겁니다. 한데 그 때까지는 러시아 반전 좌파는 극심한 탄압을 받으면서 엄청난 일을 해내야 할 것이죠...

 

 

 

[출처] 러시아는 왜 이토록 호전적인가?|작성자 박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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