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글챌린지 민중이 들고 일어나지 않는 이유 - 박노자

20세기의 끔찍한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한 가지 유의미한 대조 비교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바로 1차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 과정 속에서의 민중의 동향을 비교해 보면 대단히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요즘 세계 체제의 상황들이 자꾸 탈세계화와 각자도생의 1930년대를 방불케 하는 만큼 좀 시의성이 있는 비교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자, 1917-18년 주요 교전국들에서 일어난 일들을 생각해보죠. 독일에서는 1917년만 해도 26만 명이 영양실조로 죽었습니다. 해상 봉쇄를 당한 나라의 식량 사정이 그 만큼 심각했했고, 국가는 그 만큼 속수무책이었죠. 다음해인 1918년에 독일 혁명이 터진 겁니다. 1917년2월의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는 빵 부족 사태는 여성 노동자들의 데모로, 봉기로, 황제의 양위로, 그리고 결국 혁명으로 번졌습니다. 프랑스에서는 후방 상황은 그 정도로 열악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3년이나 진행된, 끝도 보이지 않는 살육전에 대한 불만은 극에 달해 1917년봄-여름의 군 안에서의 집단 항명 사태로 번졌습니다. 3천4백 명은 군사 재판에 회부돼 554명은 사형을 받을 정도로 대중성이 큰 현상이었습니다. 프랑스의 Étaples시에서 훈련을 받았던 영국 군인들도 1917년9월에 집단 항의에 나섰습니다. 뒤늦게 참전한 미국에서는 사회당의 주도로 매우 강한 반전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가장 유명하지만, 사실 혁명적 기운만큼은 전쟁 막바지에 모든 교전국들을 다 덮은 것이죠. 러시아에서는 그저 지배체제가 가장 약했을 뿐입니다. 레닌 말대로 "약한 고리"이었던 것이죠.

그러면 이제는 한 번 2차 대전 막바지의 상황, 즉 1944-45년 주요 교전국들의 상황을 한 번 보지요. 전쟁으로 인한 민간인들의 고통은, 어쩌면 총력전인 2차 대전 때에는 더 극심했습니다. 독일에서는 1942-45년 사이의 연합국 (주로 미, 영)의 폭격으로 거의 50만 명의 민간인들이 숨졌습니다. 일본에서는 미 공국의 폭격은 - 원폭 피해자들까지 포함하면 - 약 33만7천 명의 민간인 (상당수 조선 노동자 등을 포함하여)을 죽인 겁니다. 1917년2월에는 페트로그라드에서 빵이 부족했을 뿐이었지만, 레닌그라드로 개명된 같은 도시에 대한 1941-43년 독일 군 봉쇄의 결과로 1백만 명 넘는 시민들이 아사했습니다. 말 그대로 "심판의 날"을 방불케 하는, 전례 없는 참경이었는데...그 어느 교전국에서도 혁명은커녕 시민들의 대중적인 집단 항의 사태도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파업 정도는 일어나긴 했지만, "거기까지"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을 포함한 절대 대다수의 독일인들은, 독일 패망의 마지막 날까지 사력을 다해서 전쟁에 임했던 거죠. 민병대 (Volkssturm)의 경우 12-13살의 아이들도 참가한 겁니다. 소련의 경우 스탈린 정권이 곧 무너질 것 같았던 전쟁 초기에는 수많은 군인들이 자진 항복하고, 스탈린 정책에 불만이 많았던 수십만 명의 피점령 지역 주민들의 적극적 친독 협력 (부역) 행위들이 있었지만, 극소수의 사건을 제외한 정권에 대한 집단 항의 움직임은 국내에서는 없었습니다. 1945년봄 동경 주민들의 천황제와 전쟁에 대한 항의 움직임이란, 기껏해야 "천황을 쫓아내 미국처럼 대통령제로 바꾸자!"는 식의 불온 낙서 정도이었습니다. 세계사에서 가장 끔찍했던 전쟁 때에 과연 모든 교전국의 대중들이 왜 이토록 순종적이었을까요?

해답은 사실 간단합니다. 탈세계화와 각자도생의 1930-40년초반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체질"을 몇 가지로 바꾼 것입니다. 그 중에서는 "혁명의 예방"에 핵심적이었던 요소는 3가지이었습니다:

  • 배급제는 가장 중요했습니다. 배급제를 통해 모든 교전국에서 중앙 권력이 재분배를 통해 민생, 즉 "모두들의 생존"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 겁니다. 일본에서는 1945년4월부터 배급제는 거의 "붕괴" 지경으로 왔지만, 좌우간 "민생에 대한 국가의 책임" 원리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른 교전국들도 그랬듯이, 전시는 일본에서도 국가화된 복지제도의 "요람"이었습니다. 1938년에 후생성이 창립되고, 1944년에 이르러 5천만 명의 일본인들이 국민건강보험 조합에 가입돼 보다 손쉽게 의료에 접근하게 됐습니다. 1944년에 후생연금법이 통과돼 공식 부문의 사무원과 노동자들에게 "노후 연금"을 받는 가능성이 열리고, 1941년에 창립된 "주택 영단" (국민 주택 공사)이 "국민 보급용" 저가 주택의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전형적으로, 전쟁 (warfare)과 복지 (welfare)가 손잡고 같이 무대에 나타나게 됐습니다. "전쟁하는 국민"에 적당한 수준의 "복지 혜택"이 필수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국민의 사기"를 유지하여 "소요 사태" 등을 예방할 수 있었던 거죠.

  • 민족주의는 모든 교전국들의 최강의 "내부 결속"의 도구이었습니다. 1917-18년에 호옌촐레른 왕조나 로마노프 왕조에 대한 "신민들의 충성"은 이 정도로 강력한 "내부 결속"을 보장할 수 없었지만, "독일 민족을 위한 생존 공간"이나 "소비에트 조국"과 같은, 보다 대중적이고 수평적인 구심점들은 국민/인민들의 "심장"을 장악하기에 훨씬 더 적절했습니다. 독일, 일본, 소련의 병사들은 전부 다 의무 교육을 받은, 즉 "국민/인민화"된 주체들이었으며, 1917-18년에 비해 국가의 이데올리기를 훨씬 더 철저히 내면화했습니다.

  • 비밀 경찰과 대국민 감시는 1940년대 초반에 이르러 엄청나게 발전됐습니다. 제정 러시아의 비밀 경찰 (Okhrana)는 그 종사자의 숫자는 1천 명에 불과했으며, 프락치/정보원들은 많아야 수백명, 즉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대조적으로, 1940년, 즉 소-독 전쟁 개전 직전에 소련 NKVD (내무인민위원회) 간부들의 수는 32,163명이었으며, 비밀 정보원들은 아예 30만 명 이상이 됐습니다. 모든 주요 작업장에는 적어도 한 명의 기관 정보원이 배치돼 있어 "불온 행동"이 개시될 것 같은 기미가 보이자마자 바로 "신고"를 해야 했습니다. 이런 완벽한 경찰 국가를, 제정 러시아의 지배자들이 꿈조차 꿀 수 없었던 거죠.

제2차 세계 대전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과연 무엇인가요? 배급제/기초적 복지제도와 초강력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비밀 경찰의 전국적 감시, 통제망으로 무장한 국가는, 아무리 최악의 상황에 몰려도 그렇게 쉽게 내파되지 않습니다. 탈세계화 추세와 함께 앞으로는 오늘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같은 전쟁들이 더 빈번해질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혁명적 상황"들은 절로 만들어지지 않을 겁니다. 정말 "혁명"을 원한다면 탈세계화 시대의 통치자들이 전형적으로 제시하는 초강력 민족주의보다 더 호소력이 강한 이념도 제시해야 하고, 비밀 경찰의 감시망을 상대해서 이길 수 있는 조직도 필요할 것입니다. 예컨대 러시아에서는 이런 이념과 조직이 좌파의 손에 언제쯤 주어질는지 아직은 전혀 예견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즉, 앞으로 아주 장기간에 걸칠 고난도의 투쟁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죠...

 

 

 

[출처] 민중이 들고 일어나지 않는 이유|성자 박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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