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글챌린지 < 고독과 고립의 경계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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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

 

1. 지난 해 포스트모더니즘 세미나의 휴식 시간에 노트북 컴퓨터와 스피커를 강의실에 가지고 가서 음악을 틀어주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이 피아노 음악을 작곡한 사람이 누굴지 추측해보라고 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간에 등장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라는 힌트만을 주었을 뿐이다. 예상대로 음악만을 듣고서 그 작곡가를 알아맞히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의 침묵 후, 내가 가지고 갔던 CD를 보여주자, '아...!' 하는 작은 탄성이 여러 명의 학생에게서 나왔다. 작곡가의 이름은 "니체"다.

 

2. 니체가 피아노 음악을 작곡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는 학생들과 '니체'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러한 '실험'을 두어 번 했다. 하나는 피아노 음악 작곡가로서의 니체,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그가 썼던 "미지의 신에게 (To the Unknown God)"라는 시를 학생들에게 읽게 하고서, 이 시의 저자가 '유신론자'인가 '무신론자'인가에 대한 투표'를 한 적이 있다. 세미나를 듣던 열 두어 명의 대학원생들 모두가 이 시의 저자가 '유신론자'일 거라는 것에 손을 들었다. 내가 니체를 주인공으로 이런 '실험'을 하는 이유는 한 가지이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대상에 대하여 실제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데리다가 만든 신조어인 '차연 (différance)'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3. '차연'은 '시간성(temporality)'과 '공간성(spatiality)'의 차원을 지닌다. 시간성은 '뒤로 미루다(defer)'의 의미이고, 공간성은 '다르다(differ)'의 의미다. 물론 시간성이나 공간성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는 아니지만, 조금 생각해보면 이미 우리에게 늘 벌어지는 내용을 개념화한 것 뿐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언제나 이미(always already)'라는 표현을 즐겨한다. 우리가 인식하든 하지 못하든 '언제나' 그리고 '이미' 누군가에 대하여 우리가 'X에 대하여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 X의 온전한 모습 (만약 이런 것이 있다면)은 언제나 이미 '다르며' 그 온전한 모습을 아는 것은 '뒤로 미루어진다'는 것이다.

 

4. 사상가든 예술가든 내가 끌리는 사람들이 지닌 유사성이 있다. '고독의 공간'에서 살아간' 이들이다. 그 어떤 정황에서라도, 그의 내면세계에서 '고독의 공간'을 지켜내 온 이들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고독의 공간'을 '절망과 낙담의 자리'가 아닌 '창의성과 존재에의 용기의 자리'로 만들어 간 사람들이다. 11살 때 유대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다니던 학교에서 이유도 모르고 추방당한 경험을 하며, 평생 '아웃 사이더'로 살아간 자크 데리다, 자신이 살던 독일로부터 나치의 박해를 피해서 파리로 뉴욕으로 망명하여 살던 한나 아렌트, 사람들이 자신의 사상을 이해할 거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아서 "나는 "죽음 후를 산다(I live posthumously)"라고 했던 니체,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교수로 가르치면서 글과 말과 운동으로 차별에 대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고 한 때 콘서트 피아니스트의 꿈을 가지기도 했던 에드워드 사이드, 청력을 잃어가면서도 '지금 너머-세계에 대한 열정'을 지켜내고 승화시킨 베토벤, 처절하도록 고독하게 살던 밴 고호... 이렇게 자신의 '고독의 공간'을 용기 있게 지켜내고 가꾸어 낸 사람들에게, 나는 끌린다.

 

5. 우리 모두는 어쩌면 '고독(solitude)'과 '고립(isolation)'의 경계에 늘 서 있는지 모른다. 이 두 세계는 '홀로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그 유사성이 있다. 그러나 그 공간에 서 있는 '나'가 개입하는 이 세계에서의 자리는 완전히 다르다. '고독의 공간'은 사유하기, 중심부와의 거리 두기, 반(反)관습적인 창의성이 꽃 피는 자리며, 무엇보다도 자신과 만나는 자리다. 반면 '고립의 공간'은 우선적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며, 이 세계로의 개입이나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스스로 삭제하는 공간이다. 겉으로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고 해서, 또는 SNS를 통해서 늘 무엇인가에 연결되어 있다고 해서, '고립의 공간'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그 자신과 연결된 타자와 세계를 생각하고, 자신의 내면세계를 가꾸기 위한 다층적 작업을 외면할 때, 아무리 사람을 많이 만난다고 해도 결국 그는 '고립의 공간'에 갇혀있게 된다.

 

6. 자신과의 정원을 가꾸는 것, 타자와의 관계의 정원을 가꾸는 것은 '고독의 공간'을 용기 있게 지켜내고 대면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아렌트가 비판적 사유는 '고독(solitude)' 의 자리에서만이 가능하다고 한 말은 이 '고립의 시대'에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고독의 공간'에 있지 못하는 사람은 타자와 진정으로 '함께' 있을 수 없다. 스마트폰은 끊임없이 '알림'을 보냄으로서 SNS와 밀착되어 살라고 강요하고, 코로나 19과 같은 다양한 위기들이 우리에게 '불안'을 강요하는 이 시대에, '고립의 공간'이 아닌 '고독의 공간'을 지켜내고 가꾸어야 하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


===


**니체의 음악은 다음의 링크에서 들을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YBwNcTeY7M

 

 

댓글 2

Gaius 작성자 2020.06.27. 09:26
미지의 신에게
 
                          니체
 
새로운 출발을 하기 전에
전도를 멀리 내다보기 전에,
다시 한번 나는 외로움에 몸둘 바 몰라
두 손을 들어 당신께 빕니다.
당신에게로 도망쳐서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당신의
제단을 장엄하게 축성합니다.
어느 때일지라도
당신의 목소리가 나를 다시 부르도록.
 
제단 위에는 다음의 말이 깊이 새겨져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미지의 신에게'라고.
나는 그의 소유, 설사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독자의 무리 속에 있었다 할지라도.
나는 그의 것. 그리고 나는 느낍니다.
싸움에서 나를 쓰러뜨리고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그를 섬기도록 나에게 강요하는 올가미의 힘을.
 
나는 당신을 알고 싶습니다. 미지의 신이여.
깊숙이 나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그대여,
폭풍우와도 같이 나의 삶을 꿰뚫고 지나가는 당신,
붙잡기 어려운 당신, 나와 한 핏줄인 당신,
나는 당신을 알고 싶습니다. 자진해서 당신을 섬기고 싶습니다.
댓글
rraccoon 2020.06.27. 10:18
고독의 공간을 창의성과 존재에의 용기의 자리로 만들어 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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