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글챌린지 < 나/우리는 왜 쓰는가: 글쓰기와 글읽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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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

 

1. “나는 글쓰기에서 고향을 발견한다 (I find home in my writing).” 포스트콜로니알리즘의 중요한 이론가 중의 한 사람인 에드워드 사이드(E. Said)가 한 말이다. 내가 늘 마음속에 품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카이로, 예루살렘에서 자라고 미국 뉴욕의 콜럼비아 대학교에서 가르치다가 2003년 암으로 죽은 사이드, 그는 ‘고향’에 대한 강렬한 갈망을 품고 평생을 살아갔다. 그의 자서전의 제목이 “아웃 어브 플레이스(Out of Place)”인 이유이다.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어떻게 ‘글쓰기’에서 ‘고향’을 발견하는가. 

 

2. 사람마다 글쓰기 행위는 매우 다른 것을 의미한다. 어떤 이에게 글쓰기는 매우 간단하고 쉬운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내게 한 편의 글쓰기는, 글의 장르와 상관없이, 언제나 나의 ‘존재함’이 담고 있는 ‘작은 세계의 출산’을 의미한다. 출산의 ‘고통’과 동시에 ‘의미’를 경험하는 일이다. 사람마다 목소리가 다르 듯, 모든 글은 저자의 ‘글소리’가 담겨있다. 즉, 각기 다른 색채와 소리를 뿜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동일한 주제에 관한 것이라도,  다양한 글 들이 나오는 이유이다. 

 

3. 쓰기는 언제나 읽기와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서 ‘읽기’는 쓰여진 텍스트만이 아니라, 사건을 읽고, 정황을 읽고 해석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쓰기’와 ‘읽기'는 분리불가의 관계에 있다. 타자의 ‘글읽기’란 마치 깨어지기 쉬운 물건을 다루듯이 섬세하게, 조심스럽게, 치밀하게, 인내심을 가지고 접근해야 하는 행위이다. 그렇기에 특정한 사건에 대하여, 또는 특정한 텍스트에 대한 타자의 글이 왜 자신과 ‘똑같이’ 읽고 해석하고, 쓰지 않는가라고 하는 것은 타자의 글읽기에 대한 자세가 아니다.  

 

4. 나의 직업상 나는 ‘문제 제기’하는 것이 디폴트인 학회들이나 모임에 종종 가곤 한다. 그런데 타인의 글을 분석하고 논쟁을 하는 것이 직업인 학자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언제나 두 종류의 ‘글읽기’가 존재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논찬자’ 역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논찬자 역할을 가능하면 하지 않는다. 두 종류의 글읽기가 있다는 것은 두 종류의 논찬자가 있음을 의미한다. 

 

5.    첫 번째 종류의 논찬자는 그 발제에 ‘있는 것’을 긍정하고 보려는 일차적 시도를 생략한 채, 그 발제문에 ‘없는 것’만을 먼저 찾아내어 비판하는 것이 논찬자의 우선적 과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발제문에 ‘왜 OO가 없는가’를 끄집어내는 것이 자신의 학자로서의 재질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태도이다. 한 편의 글을 탄생시키기 위한 과정이나 그 의미도 보지 않고, 또한 글쓰는 사람에 대한 우선적 존중심도 결여된 글읽기 자세이다. ‘없는 것’만을 끄집어내는 것이 자신의 지적 우수함을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불행스럽게도 학술모임에서의 많은 '논찬자'들이 이러한 방식의 논찬자 역할을 하는 것을 종종 보게된다. 

두 번째 종류의 논찬자도 있다. ‘더블 리딩(double reading)’을 하는 사람이다. '이중적 읽기'라고 할 수 있는 '더블 리딩'은 ‘1차 읽기’와 ‘2차 읽기’가 있는 읽기 방식이다. 1차 읽기에서 읽는 이는 그 텍스트가 지닌 의미와 그 텍스트의 정황 등에 대한 세밀하고 인내심 있는 과정을 거쳐서 그 텍스트가 지닌 의미를 드러내고자 한다. 즉, ‘긍정(affirmation)의 읽기’ 단계이다. 2차 읽기에서는 그 텍스트가 보다 확대되어야 할 점, 또는 새롭게 조명해야 할 점, 또는 가능한 문제점 등을 짚어내는 것이다. ‘문제 제기 (contestation)의 읽기’이다. 

 

6. 한 편의 글을 쓰는 것은, 하나의 ‘작은 세계’를 탄생시키는 과정이다.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타자의 글읽기는 ‘더블 리딩’으로서의 글 읽기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타자의 글 읽기 방식이며, 그 글 읽기를 통한 타자와의  소통방식이다. 학자들의 세계만이 아니라, 이 SNS상에서도 두 종류의 응답자, 두 종류의 읽기/해석하기가 공존하고 있음을 본다. 타자의 글을 읽고 해석한다는 것은 ‘인내심 있는 읽기(patient reading)’와 ‘세밀한 읽기(close reading)’가 요청된다. 이러한 글 읽기는 특정한 직업군의 사람으로서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감을 담은 글읽기 방식이다. 성급한 읽기와 해석하기를 통해서 급하게 결론 내리는 것은, 이 세계의 복합성을 담은 사건, 사람, 시대적 함의 등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7. 직업상 글쓰기와 글읽기는 나의 일상이다. 다양한 분야의 학자의 글들, 매스 미디어에 등장하는 글들, 학생들의 논문, 페이퍼 등,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장르의 글들을 읽고, 이해하려고 하고, 그것을 나의 삶의 정황에서 연결시키고 해석하는 것—이것이 나의 일상이다. 또한 학문적인 글, 칼럼, 또는 학생들에게 보내는 코멘트와 같은 글도 써야 한다. 그 뿐인가. 편지도 쓰고 메시지도 쓴다. 이런 읽기와 쓰기만으로도 나의 개인적 시간은 이미 꽉 차 있다. 그런데 도대체 나는 왜 페북에까지 글을 쓰는가. 우리는 왜 쓰는가. 

 

8.    글 쓰기는 살아있음의 표시이다. 글 쓰기는 이 세계에 개입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우리가 각자의 정황에서 경험하는 사건과 정황에 대한 ‘나’의 읽기를 타자와 나누고, 알리고, 개혁하고, 평가하고, 이해하고, 논의하고, 드러내고, 밝히고자 나/우리는 글쓰기와 글읽기를 한다. 우리가 읽고 써야 하는 텍스트는 책이나 쓰여진 문서만이 아니다. 이 세계가 바로 텍스트이다. ‘텍스트로서의 세계’를 읽어내고, 쓰는 것—살아있음을 외치는 하나의 소중한 방식이다. 

 

9.    “나는 글쓰기에서 고향을 발견한다.” 

‘고향’이란 생물학적으로 태어난 지리적 공간만이 아니다. 글쓰기와 글읽기 공간은, 이 세계 내에서 나/우리의 존재함을 발견하고, 존재함의 의미를 창출하는 공간, 또한 나/우리의 존재함을 비로소 느끼고, 그 존재함과 입맞춤을 하는 공간이다. 이것이 바로 나/우리에게 고향의 의미가 아닐까. 나의 ‘고향’을, 그리고 타인의 ‘고향’을 소중하게 대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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