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글챌린지 『반바지 당나귀』 중에서
- 고맹골넣으면닉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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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하고 아마 좀 나이가 든, 잘 다듬어진 회색 털을 가진 당나귀였다. 시름없는 귀에 겸손한 눈을 지닌 당나귀, 걸음걸이가 절도 있는 당나귀, 건방지지도 천박하지도 않은 당나귀, 자기가 당나귀임을 잘 알고 있으며 그런 사실에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자신에 더 깊이 충실한 당나귀, 걷고, 멈추고, 다시 떠나고, 돌고, 물마시고, 풀 뜯고, 바라보고, 듣고 순종할 줄 아는, 이 모든 것을 당나귀답게 할 줄 아는 당나귀, 분명 명상하기를 좋아하는 당나귀, 많은 것을 보았고 많은 것을 배웠으며 많은 것을 용서하기도 한 당나귀, 다른 당나귀들에겐 얌전하고 사람들을 대할 땐 비굴하지 않게 공손한 당나귀, 잡화상이며 음식점 문 앞에서, 혹은 큰 군 청사 앞에서 다른 당나귀들처럼 가끔 크게 울거나 버릇없는 짓거리로 소란을 피우는 일 없이 그 모든 곳에 나타날 수 있는 그런 당나귀였다. 한 마디로, 성당 앞뜰뿐만 아니라 제 외양간에서도 자기 자리를 발견하는 당나귀, 약한 자에겐 선하고 자기 신들을 공경하는, 영혼을 부여받은 당나귀, 정직했기 때문에 어느 곳에 가든지 머리를 곧게 세우고 걸을 수 있는 당나귀, 당나귀네 세계에서도 공정한 판별이 있다면 제 종족의 영예가 될 그럴 당나귀였다.
아! 하지만 말이다. 온 마을로 하여금 그에게 각별한 눈길을 보내게 했던 이 모든 칭찬할 만한 자질들은 매년 겨울이 시작될 무렵 자칫 망각 속으로 떨어질 뻔하곤 했다. 분명 홀로, 당나귀를 내심 기쁨으로 삼았을, 그에게 표명된 이 각별함은 섣달 첫추위가 닥치자마자 사라질 위협을 받곤 했다. 왜냐하면 나무랄 데가 없는 이 완벽한 당나귀는 그때부턴 바지를 걸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바지는 실상 그의 두 앞다리나 고작 감싸줄 뿐이었다.
(중략)
……다시 걷기 시작한 그는 수예 잡화점을 돌아 묘목상 코카르도의 암 노새를, 그쪽으로 눈길 한 번 던지지 않은 채 얌전히 마주쳐 지난 후 삐스타쉬에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그는 조심스레 큰길을 건너고 예쁜 십자가 분수대에서 물을 두어 모금 마신 뒤 마지막 인가들을 지나 들로 나섰다.
기이하게도 꼬마 일당은 거기서 멈춰 섰다. 그들 중 아무도 들판을 가로질러 당나귀를 따라가지 않았는데 더욱 이상한 일은 그를 입으론 놀려 대긴 했어도 아무도 행동으로는 전혀 그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중략)… 모두들, 쉬코마저도 심한 농이나 던질 뿐 그 이상은 없었다. 욕도 거의 하지 않았다! 기실 욕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쉬었음에도! 무언가 모를 강하고도 부드러운 그 어떤 것이 당나귀를 지켜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어디를 가건 이런 비밀스러운 호의가 그를 따랐던 것이다.
그가 라샤뻴의 포도밭 뒤, 오래된 담벼락 한 모퉁이로 사라졌을 때, 다른 애들처럼 나도 멈춰 섰다. 그러나 다른 애들은 왁자지껄 마을로 곧 되돌아갔지만, 이처럼 들판을 온통 가로질러 혼자 돌아가는 그 기이한 당나귀가 과연 어디로 향해 가는지 지켜보고 싶은 생각 때문에 나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저 멀리 가이욜 다리 너머로 그를 바라보았다. 곧 그는 옆길로 새더니 성 안나 경당 앞에 나타났다가 마침내는 사람들이 ‘예지의 영토’라 부르는 올리브 숲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끝으로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앙리 보스코, 『반바지 당나귀』에서,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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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인 『반바지 당나귀』 초반부입니다. 제 글 성향이 자리 잡은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소위 말하는 나씨나길이지만 씨를 빼면서 경박하지 않은 이 움직임이 너무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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