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글챌린지 '빠'들의 세계 - 박노자

'빠'들의 세계 - 박노자

 

대학에 대해 상아탑이니 뭐니 다소 낭만적인 비유들이 있지만, 사실 근대적 대학이란 엄청나게 복잡한, 그리고 상당히 시장화한 관료 조직입니다. 이 조직의 작동 방식 같은 게 외부에서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외부에서 잘 보이는 게 기껏 대학의 '스타 교수' 같은 구성원들인데, 이들은 대학 조직의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예컨대 '성공회대학'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연상되는 건 조희연 교수나 김동춘 교수, 한홍구 교수와 같은 진보 명망가 교수들입니다. 그런데 대학에 그 분들도 계시지만, 대학을 운영하는 건 진보파 교원이라기보다는 (종교) 재단입니다. 이 제단에 기부하는 한화 등 기업들이 바깥에 있는가 하면 대학 안에서는 또 철저하게 서열화돼 있는 부서, 직급의 구조가 있는 것입니다. 대학에서 몇 분의 진보 명망가들의 존재는 예컨대 학교 분위기를 확실히 좋게 몰고 갈 수는 있지만, 대학 작동의 방식을 본격적으로 바꿀 수 있는가 하면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일개 교원은 고위 행정가도 아니며 보통 40대초반에 취직하고 65세에 퇴직하는 '직장인'에 불과합니다. 대학 재단은 그것보다 훨씬 더 장기지속하는 기관이지요.

국가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거직 (대통령, 국회 의원 등)들은 '권력'의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가시성이 높아서 그렇지, 사실 거시적으로 봤을 때에 권력의 핵심도 아닙니다. 권력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돈, 칼, 그리고 법입니다. 이 모든 권력의 요소들을, 개발독재나 중국식 당-국가 시스템이라면 모를까, 5년짜리 민간 정권은 당연히 완전하게 장악할 리는 전무하지요. 돈으로 따지면 한국 GDP의 44% 정도를 10대 재벌 기업들이 차지합니다. 삼성전자만 해도 한국 GDP의 14% 정도 콘트롤하는 것입니다. 중국, 베트남, 북조선 식 당-국가 시스템 아니면 세상이 다 재벌 자본주의지만, 재벌이 이 정도로 강력한 장악력을 발휘하는 사회도 없습니다. 일본의 최대 매출의 기업인 토요타 자동차는 일본 GDP의 5% 밖에 차지하지 않으며, 미국의 최대 기업인 월마트는 아예 2,6% 정도죠. 그러니까 세계 비교론적으로 봐도 삼성은 정말 희대의 공룡인데, 이 공룡을 5년짜리 대통령이 통제할 리가 있겠어요? 물론 없고, 아무리 삼성의 파워를 꺾을 생각이 애당초에 있었다 해도, 당연히 중간에 타협하고 맣지요. '칼', 즉 군대는 미국에 강력하게 종속돼 있으며, 그 기본틀은 독재정권 때에 조형된 것입니다. 선거직 공무원은 군 고급 장성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선택의 폭이나 개입의 폭은 사실 적습니다. 그리고 법, 즉 사법 기구들은 물론 행정부의 영향을 받긴 하지만, 역시 개발독재나 당-국가 시스템이 아닌 이상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스타 교수나 스타급 선거직 공무원이나, 그 실질적인 영향력은 그 가시성 만큼 전혀 강하지는 않죠.

그런데 실질적인 권력자인 재벌 대주주나 검찰청 고급 인사, 아니면 군이나 첩보기관의 고급 간부들의 활동은 공개적이지 않습니다. 언론에서 약간 비추어질 뿐이지, 언론만 보고 실질적 권력이 움직이는 방법을 일반인이 알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는 선거직 공무원의 활동은 늘 다수의 시야에 잡힙니다. 관료는 서로 비공개 경쟁믈 하지만,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경선, 유세, 대선을 하고 매일매일 이런 저런 대국민 언행을 보여야 합니다. 실질적인 권력 서열로는 대통령은 이재용 등등에 밀려 예컨대 5위, 6위 일 수는 있지만, 가시성의 서열로는 국내에서는 대통령은 1위입니다. 권력이 이처럼 가시화되니 생기는 파생 현상 중의 하나는 바로 권력 팬덤들입니다. 소위 각종의 '빠'들이 조직화해서 가시성이 높은 권력자의 '친위대'를 자처합니다. 그런 조직은 박근혜에게도 있었지만 현 대통령에게도 있는 것이죠.

한국의 권력자 팬덤 현상은, 세계 보편적이면서도 다소 특이합니다. 팬덤 정치 자체야 다른 데에도 당연 있죠. 샌더스에게도 트럼프에게도 열광적인 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차이는 강령 팬이냐 개인 팬이냐지요. 구미권의 정치 팬덤은 다분히 이념적입니다. 샌더스의 열광적인 지지자들은 샌더스 개인에게 열광한다기보다는, 사민주의 복지 국가 건설 프로젝트에 열광하며, 친트럼프 과열 팬들의 상당수는 인종주의자이자 자국 본위론적 국수주의자들입니다. 반면, 한국에서는 "지도자님' 개인에게 훨씬 더 강력하게 초점이 두어지는 것입니다. "문재인 보유국"에서 산다는 '문프'의 지지자들이 만든 '파파미' (파도 파도 미담 - 문 대통령의 인격 관련 미담이 많다는 것을 일컫는 표현)와 같은 별칭들을 보면 이게 그 무슨 '사상'이나 '이념', '프로젝트'와 이미 무관합니다. 어디까지나 '성품론'으로 넘어간 것이죠. 하기야 극우 진영의 '박근혜 중심주의'는 더하면 훨씬 더 합니다. 지금 다소 재편됐지만, 2010년대 중반만 해도 한국의 극우 계파들의 분류법은 온통 '박'을 중심으로 해서 돌고 있었습니다. 친박(親朴)의 종류만 해도 원박(元朴:원조 친박), 구박(舊朴:옛날부터 친박), 신박(新朴:새로운 친박), 신신박(新新朴), 경박(經朴:경제계쪽 친박), 복박(復朴:복귀한 친박), 노박(원로박), 은박(은밀한 친박), 주리야박(입으로는 중립을 외치며 마음속으로 친박), 올드 박(Old Park), 영박(Young Park:젊고 참신한)....'박'이 중심적 역할을 했던 만큼 박사모의 기세도 엄청 위풍당당하고, 그들이 박씨를 '모시는' 것은 '전근대성' 시비를 일으킬 정도이었습니다. '이념'보다는 '박'이라는 '지도자님' 개인에 완전하게 매몰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울산에서의 "박근혜 대통령이 국박을 드신 집"과 같은 현수막을 봤을 때에 정말 모종의 '전근대성'이 느껴졌지만, 사실 이 권력자 팬덤 현상 자체는 극도로 근대적입니다. 권력을 평생 얻을 일 없는 무력하고 원자화된 신자유주의 사회의 개인은, '문프'나 '박'에 매몰함으로써 상징적으로나마 '힘'을 얻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본인은 여전히 어렵고 외롭고 힘들고 항상 위험과 경쟁에 노출돼 있지만, 그의 상상 속에서는 그는 '위대한 개혁" (아니면 '자유민주주의 수호')의 조력자쯤이 되고 '노짱'이나 '문프'와 함께 '우리 나라의 역사'를 함께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노무현 정권의 '개혁'이 재벌 공화국,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구조적 한계에 봉착해 결국 용두사미로 끝난 역사를 뻔히 알아도 이 분들은 여전히 열정적으로 현 권력을 결사적으로 옹위들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과정에서 그들은 결국 신자유주의 사회에 상처를 입어온 자신들의 자아를 스스로 대사회적 '자위'를 해서 복원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상상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복원이지만, 본인에겐 현실로 인식될 것입니다.

한 가지만 분명히 말해둡시다. 저는 권력자들의 열성 지지자들을 '비판'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이 현상을 구조적으로 이해해보려 하는 시도에 불과합니다. '비판'을 전혀 할 의도가 없는 이유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의 현실 도피의 방식으로서는 정치인/권력자 열성 팬덤질이 그나마 '아주 좋은' 편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알콜이나 마약 중독, 성매매, 대중문화에의 매몰, 게임 중독, 아니면 광직인 종교에의 합류보다는 차라리 유력 권력자의 '조력자'되는 것은 잠시나마 상상의 세계에서 자신의 소외된 존재를 잊는 방식 중에서는 그나마 제일 나을 것입니다. 문제는, '권력에의 조력' 열광 속에서 기본적인 인권 감수성을 상실하는 데에 발생됩니다. 아무리 자칭 '개혁 정권'에 열광해도 성추행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가하는 등 인권 침해에 동조해서는 안됩니다. 마찬가지로, 전라도 출신이나 좌파 이념의 동조자 등을 모독하며 인신 공격하는 태극기 집회의 표어들의 상당부분은 민주 사회에서 용인되어서 안되는 종류에 속하지요. 아무리 상상의 세계에서 자신의 소외를 극복하려는 시도라 해도 '열광'의 와중에서 타인에게 상처를 입혀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인권 감수성을 높이는 것은 정치 팬덤 집단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핵심적 과제이기도 하지요.

 

 

 

 

 

출처 : 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222054952948

댓글 3

레노 2020.09.17. 21:40
'열광'의 와중에서 타인에게 상처를 입혀서는 안됩니다
좋은 구절이네요
댓글
레노 2020.09.17. 21:41
 레노
이번에는 글 밑부분에 이상한 현상이 안나타나네여
댓글
조현수 2020.09.17. 23:06
이 분 책 두개 정도 읽었는데 사실 그렇게까지 생각해보진 않았는디, 요 글은 되게 냉소적이네요. 읽는 제가 변한거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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