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글챌린지 나를 구해준 은행 직원 이야기 - 박노자

대한민국의 행정 시스템에서는 저 같은 인간은 ‘문제적’인 존재입니다. 한편으로는 분명 대한민국 여권이지만, 한편으로는 주민 등록 번호가 없어서 ‘국민’으로도 ‘외국인’으로도 처리가 곤란한 애물단지 그 자체죠. 대한민국은 – 잘 아시겠지만 – 이분법의 사회입니다. ‘우리’가 아니면 ‘남’인데 ‘우리’의 일부분임을 나타내는 표식은 주민 번호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이분법의 틀에 틀어맞지 못해요. 귀화 과정을 마쳐 한국 여권을 받았을 때엔 이미 노르웨이 주민이었기에 국내 주소가 없어 주민 번호를 부여 받을 ‘자격’이라고 없었어요. 그나마 옛 여권에서는 가번호라고 해서 ‘1000000’으로 돼 있었는데, 여권을 다시 발급 받았을 때엔 그 숫자마저 슬거머니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러다가 번호가 없는, 즉 국내에서 ‘권리’가 없는 인간으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이 일은 저의 주 거래 은행에서 발생됐습니다. 국내에서 임시로 초빙 연구원의 직에 들어앉게 돼 잠시나마 ‘월급’이 생겼기에 체크카드라도 만들어 버스 요금이라도 편하게 내자 싶어 은행으로 찾아 갔습니다. 그런데 아뿔사, 전혀 예상치 않았는데, 거기에서 바로 퇴짜를 맞고 말았습니다. 본래 제 통장이 위에서 말한 그 가번호로 만들어진 것인데, 가번호가 없는 여권을 보이면 실명 확인이 안된다고 하여, 통장 분실시에 재발급도 안된다는 말까지 덧붙였습니다. 저는 거의 절망적 심리 상태에서는, ‘그러면 내가 내 잘못도 없이 이런 상황에 처해진 셈인데, 어찌 해야 해결이 되느냐’고 묻자, 출입국 관리 사무소에 전화해서 거소신고라도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제게 되물었습니다.

제가 별 수 없이 은행 문을 나서서 그렇게 했습니다. 목동 사무실, 세종료 사무실로 약 40분 동안 안내를 받는 시도를 해왔는데, 자동안내 시스템이 계속 오작동돼 빈번히 실패했죠. 결국, 이미 거의 ‘신경질환’에 가까운 맘 상태에서 통화에 성공했는데, 거소신고제가 이미 폐지됐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젠 해외국민용 주민등록증을 만드는 게 법이고 저도 신청하긴 해 놓았는데, 신청을 하면 잠제적 범죄자인 것처럼 모든 손가락 지문을 다 찍어 약 한 달 동안 신원 조회부터 경찰에 맡겨 하는 법입니다. 그리고 그 대기 기간에는 무권리의 존재로, 외국인도 국내인도 아닌 존재로 이를 악물고 살아야 되는 셈이죠. 제가 귀화를 하지 않고 그냥 외국인 등록증으로 서울 생활을 했다면 제 인권을 훨씬 더 잘 보호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봤죠.

그러다가 그 날 저녁 5시반에 돌연히 저를 응대한 그 은행 직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이렇게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 도와주고 싶다, 혹시 옛날 여권이라도 갖고 있으면 그걸로 실명 확인 해보겠다, 이런 말씀을 나누었다가는, 결국 다시 한 번 확인해본 결과, 가번호가 없는 새 여권으로도 체크 카드 발급이 가능하다고 제게 통보했습니다. 저는 그 순간에는 얼마나 기뻤는지도 몰라요. 버스의 현금 승차시 기사님들의 싫은 눈치를 보는 것도 피곤한 일이지만…무엇보다 제게는 ‘우리 아니면 남’ 시스템으로 작동되는 이 체제 속에서 그나마 ‘우리’와 비슷한 인권의 일단이라도 생겨서 엄청나게 기뻤던 것이죠. ‘모든’ 권리는 아마도 주민등록증이라는 ‘우리’ 집단 소속 증명서가 발급돼야 부여되겠지만요. 좌우간에 무권리 상태에 처한, ‘다르게 생긴’ 사람을 이렇게 ‘인간적으로’ 봐준 은행 직원에게 얼마나 고마웠는지도 모르죠.

 

그 고마운 맘을 제가 오랫동안 간직하겠지만…이런 생각도 듭니다. ‘주민 등록 번호’ 없는 사람들에게 시민이 누려야 할 권리들을 박탈하는 이 획일주의적인, 병영식의 시스템은 정말 ‘인권 국가’로서 정당한 것인지 언젠가 이 나라를 지금 통치하는 리버럴 정치인들을 만나게 되면 한 번 정중히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인권 변호사 출신들이 많은 집단인데 말씀이죠. 그리고 제가 만약 예컨대 ‘동남아 노동자’ 신분이나 조선족이었다면 이런 배려를 과연 기대할 수 있었을까 라는 질문을 또 스스로에게 던지게 됩니다. 물론 한국의 현대판 ‘노비’들에게도 ‘착하게’ 대해주는 사람들은 있습니다. 시스템이 어떻든 간에 이걸 넘어서는 인격이라는 게 늘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과연 그런 인격자들을 종종 만나는 것만으로는 반인권적인 체제의 무게 밑에서 깔린 사람에게 충분한 위안이라도 될까요? 아닐 것 같은데요….

 

 

출처 : 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22228151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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