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글챌린지 주변부에서 태어난 행운 - 박노자

24년 전에, 갓 서울에 들어와 살게 됐을 때에는 교육개발원에서 제게 통역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지금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맡아 하지만, 그 때엔 '외국 교회서 한국 관련 서술'에서 각종의 왜곡이나 부정확한 기술 등을 찾아내고 고치게 하는 업무를 교육개발원이 맡았죠. 통역 의뢰는, 러시아로부터 사절단의 방한, 그리고 러시아 교과서에서의 한국 관련 서술에 대한 토론 과정을 통역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토론 이전에는 교육개발원이 용역을 준 학자들은 러시아 교과서에서의 한국 관련 서술을 다 분석해 그 연구 결과를 제시했는데, 사실 '분석'할만한 서술 자체가 거의 없었습니다. 역사 교과서 같으면, '한국' 관련 언급은 6.25 전쟁 관계 서술에서뿐이었는데, 그 때 이미 교과서에서는 ('남한의 숱한 도발 행위와 무관하지 않은') 북측의 남침으로 서술이 다 바뀐 뒤이었습니다. '바로 잡을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는데, '서술' 자체가 아주 짧았죠. 남한 교과서의 러시아 관련 서술이 상당히 긴 편인데, 러시아 교과서의 짧은 서술이 호혜성 원칙을 어기는 게 아니냐는 한국측의 항의성 발언에, 러시아측에서 나선 러시아 한국학의 베테랑인 콘체비치 교수는: "두 나라의 규모나 세계사적 역할이 여태까지 호상적으로 달랐다는 게 역사적 사실이 아니냐"라고 반박했습니다. 이에 대한 한국측의 뚜렷한 반박이 없자 양쪽 참가자들이 만찬 자리로 향하고, 저는 좀 아쉬운 생각에 잠졌죠.

전 솔직히, 이런 '외국 교과서 연구'에 들어가는 한국 납세자들의 '돈'은 좀 아쉬웠습니다. 러시아에서는 그 누구도 한국 교과서에서의 러시아 관련 서술에 하등의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걸, 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국가'는 물론이고 직업적 '한국학 연구자'들도 거기에서 그런 연구를 일절 안하죠. 본인들에게 그게 한국의 내부적 문제로밖에 안보이며, '상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러시아는 그렇다 치고, 미국이나 영국, 불란서에서는 한국 교과서에서의 해당 국가에 대한 서술에 관하여 누가 한 번 관심을 가져본 적이라도 있나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 때도 그런 연구, 정정 요구 등의 사업에 적지 않은 예산이 들어갔고, 지금도 예산이 계속 나가는 줄로 압니다. 저는 그 때 그런 예산을 쓰게 만드는 것이 어떤 '트라우마'나 집단적 '콤플렉스' 아닌가 싶었는데, 어떤 면에서는 그런 '트라우마'를 가진 사회에 대해서는 상당한 '공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러시아에서도 이와 같은 '트라우마'가 있으며, 그 만큼 일종의 '동병상린'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트라우마는 '서방 콤플렉스'이죠. 한국 교과서에서의 러시아 역사 서술에 대해 러시아에서는 관심이 없지만, 예컨대 미국 역사 교과서에서 소련군이 아닌 미군의 승리들을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서술하면 그게 러시아 언론에서는 바로 지적되고, 이에 대한 반감도 엄청납니다. 서방에서는 러시아 역사나 문화, 영화 등에 대해 그 어떤 '포폄'을 하면 그게 바로 국내에서 '화제'가 되고, 은근살짝 서방 언어로 많이 번역된 문인들이나, 칸 등 서구 영화제에서 수상을 한 영화인들은 국내에서도 '어깨'를 많이 펴서 군림하듯 고자세를 취하곤 합니다. 18세기 초반 페터 1세 대제 이후로는 서방을 계속 '추격'해온 러시아에서는, 서방의 침략에 대한 트라우마도 크지만, 동시에 추격형 발전의 궤도를 밟아온 이상 '서방 콤플렉스'도 엄청납니다. 이 '외국 교과서에서의 한국 관련 서술의 연구'에선 저는 같은 모양의 콤플렉스를 보게 되어, '아아, 주변인의 콤플렉스 차원에선 우리가 외롭지 않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에 제 머리에 든 더 하나의 생각은, 어쩌면 변방에서 태어난 것도 행운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이건 구소련 영역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도 한반도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일단 주변부에서 태어나게 되면...사람은 좀 더 열려 있게 되고, '타자'들에 대해 더 민감하게 되죠. 모종의 열등감이 마음 속에서 늘 도시리는 만큼 문화, 교양에 대한 욕구도 늘 상당합니다. 예컨대 북구에 오는 러시아 사람들을 보면, 상당수는 '이 지역의 문명에 대해 교양부터 쌓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언어를 익혀 <에다>와 같은 고전이나 19세기 문학, 입센이나 스트린드베르그의 책을 막 탐독합니다. '서방의 고전'에 대한 경외 의식이 높은 러시아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입센이나 함순을 읽은 사람'이라면 존경을 받는 것이고, 우선 본인의 자존 의식부터 좀 서게 됩니다. 나도 서방의 고전적 문명을 어느 정도 접했다는 생각이 생기고요. 그런데 마침 노르웨이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사람들은 이제 입센이나 함순을 거의 안보죠. 지금 고3인 제 아들은 이 두 문호의 한 줄도 읽지 않고 고3이 될 수 있었는데...오리혀 변방인인 제게는 이런 삶이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열등감 때문에 국가 예산을 굳이 그렇게까지 필요하지 않는 '연구'에 쏟아 부을 필요는 없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주변인'은 세계촌에서는 상당히 좋은 포지션이죠. 이제 우리 주변인들끼리 서로에 대해 - '국가의 규모'와 무관하게 - 평등하게 관심을 갖고, 서로의 문화에 대해 동등하게 배우는 자세를 익히는 거야말로 우리들의 급선문입니다. 러시아도 한반도도, '서방 문명'이 아닌 세계 각국의 모든 문화, 모든 문명에 대한 '앎'을 동등하게 '교양'으로 쳐주는 그 순간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주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중심'을 심적으로 탈중심화시켜 서로에게 동등하게 손길을 내밀어줄 수 있는 기술이죠.

 

 

출처 : 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222289163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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